미국 법원이 항공기 제조사 보잉의 737 맥스 항공기 추락 사건과 관련한 유죄인정 합의를 다양성(Diversity)·형평성(Equity)·포용성(Inclusion), 일명 DEI 관련 조항을 이유로 기각했다. 회사를 감독할 독립 감찰인 선임 과정에서 보잉이 채택한 DEI 정책이 전문성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DEI가 ‘고용 과정에서 무의식적인 편견과 불평등, 차별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지지파와 ‘인종과 성별 등을 핵심 업무 역량보다 우선시한다’는 반대파 간 논쟁으로 미국에서 문화 전쟁의 핵심 쟁점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기각 결정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
5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텍사스주 포트워스의 연방지방법원 판사인 리드 오코너는 보잉과 미 법무부가 맺은 유죄인정 합의를 공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기각했다. 이번 합의는 2018년과 2019년 인도네시아와 에티오피아에서 발생해 346명이 사망한 보잉 737 맥스 항공기 추락 사고와 관련된 것이다. 보잉은 2021년 737 맥스 항공기의 문제가 있는 비행 제어 시스템에 대해 미 연방항공국(FAA)을 기만한 혐의로 25억 달러를 내는 조건으로 기소유예 합의를 맺었다. 하지만 올해 1월 알래스카항공 소속 737 맥스 9 항공기에서 비상문이 이탈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보잉의 안전 문제가 다시 주목받게 됐다. 법무부는 이후 보잉이 2021년 합의 조건을 위반했다고 판단해 형사 기소를 결정했다. 보잉은 지난 7월 이를 인정하고, 벌금 4억8720만 달러 납부와 법원 보호관찰 3년간 4억5500만 달러의 안전 개선 투자를 포함한 새로운 합의안을 제시했으나, 오코너 판사는 이를 기각했다.
오코너 판사의 이번 결정은 향후 3년간 보잉을 감독할 독립 감찰인 선임 과정에서 DEI 정책을 적용하도록 한 조항에 초점이 맞춰졌다. 오코너 판사는 판결문에서 “합의안은 감찰인 선임 시 인종을 고려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며 “이런 중대한 사건에서는 감찰인 선임이 오직 전문성에 기반해 이뤄졌다는 점을 대중이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합의안이 감찰인 선정과 감독 과정에서 법원의 역할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으며, 감찰인의 부정행위 방지 권고사항을 보잉이 준수하도록 하는 보호관찰 조건을 부과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초 DEI는 합의 당사자인 보잉과 법무부가 특별히 다투지 않은 사안이었다. 로이터는 “통상 판사들은 합의 당사자들(보잉과 검찰)이 다투지 않은 사안을 문제 삼아 유죄 인정 합의를 뒤집지 않는다”며 이번 결정이 이례적인 사례임을 시사했다.
사고 피해자 가족들은 이번 판결을 환영하고 있다. 피해자 가족 측 변호인단은 “오코너 판사의 합의 기각은 중요한 승리”라며 “이는 정부와 보잉 간의 안락한 거래였을 뿐, 보잉의 치명적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재발을 방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그동안 이번 합의가 보잉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며 반대해왔다.
이번 기각으로 보잉과 법무부는 30일 내에 향후 계획을 법원에 보고해야 한다. 양측은 합의 내용을 재협상하거나 항소를 선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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