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는 인천상공회의소의 효시다. 인천시역사자료관에 따르면 1897년 인천객주회가 모체가 돼 결성된 단체로 서상집·서상빈·박명규 등이 발기해 인천의 객주업체와 사회유지 50여 명을 회원으로 조직됐다. 여기서 인천객주회는 1885년 개항 후 인천에 들어온 외국 상권에 대항해 1885년 구성된 단체이다. 동업조합 수준이었던 인천객주회의 정신을 인천항신상협회가 승계한 것이다. 당시 인천객주회는 개항장에 유입된 새로운 상업 질서를 받아들인 단체이지만 조직이나 기능에 있어 근대적 상인단체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이후 인천항신상협회는 1905년 7월 근대적 성격의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仁川朝鮮人商業會議所)로 계승된다. 하지만 민족상권을 지키고자 자발적으로 설립된 이 협회는 1910년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한일합방되면서 해산하게 된다. 광복 후인 1946년 8월 인천상공회의소로 자리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상협회를 발기한 명단에는 서상집을 일부 서상목으로 표기돼 있지만 이는 인천시가 발행한 인천역사문화총서의 오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서상집에 대해서는 최근 여러 얘기가 있지만 객주에서 지금의 인천시장 격인 인천감리로 지낼 만큼 처세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처세술은 상인으로서 뛰어난 소질로써, 거상의 반열에 올라선다. 또 협회 발기를 주도한 서상빈은 성균진사로서 제령학교(濟寧學校)를 설립한 객주업자다. 1899년 신상협회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신상회사’로 명칭을 바꿔 활동한다. 일본 상인들도 이에 맞서 1908년 ‘인천곡물협회’를 설립하고 ‘미두취인소’와 합세해 신상협회에 대항했다.
신상협회는 미두취인소나 곡물협회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외국 상인들 특히, 일본 상인들의 상권 침탈에 대항해 민족상인의 상권을 옹호하고, 민족상인의 사업 자세를 혁신코자 촉구했다. 학교를 설립하거나 지방교육기관을 지원하는 등으로 당시 민족주의 운동의 주요한 측면인 육영사업(育英事業)을 지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