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선포 사태로 촉발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정국에 대한 시민의 분노가 진영을 가리지 않고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진보 단체 측은 “계엄은 위헌”이라며 윤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고 있고, 반대로 보수 단체 측은 “계엄은 정당하다”라며 탄핵 반대에 나섰다.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국회 표결을 앞둔 7일 오후 2시 30분. 서울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사람들이 들어찬 모습이었다. 역에 도착한 열차의 문이 열리자 열차 안에서 사람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역 밖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정체 현상이 벌어지자 곳곳에서는 “밀지 말라”는 외침이 나오기도 했다.
국회의사당역 2번 출구로 나오니 바닥에는 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의 피켓이 놓여 있었고, 시민들은 이를 하나씩 집어갔다. 본격적인 집회가 시작 되기 전이었지만, 국회 정문 앞은 물론, 국회대로 건너편 도로까지도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손글씨로 ‘윤석열 탄핵’ 문구가 적힌 족자 등 자체적으로 제작한 피켓도 눈에 띠었다. 일부 시민은 북과 꽹과리를 치면서 “반란수괴 윤석열을 체포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전날 ‘탄핵 찬성’ 입장을 내비친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집회 장소 인근 일부 카페는 ‘부담 없이 음료 가져가세요’라는 문구를 내걸고 시민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나눠주고 있었다. 몇몇 집회 참가자들은 전날 저녁이나 이날 오전 일찍 특정 도시락 가게나 김밥 전문점에 ‘선결제’를 하는 형태로 음식 무료 나눔을 하기도 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윤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무조건 가결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성남시 분당에서 온 50대 중반 윤 모 씨는 “나는 국민학교 6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상 계엄을 경험한 87학번”이라며 “수십년 만인 2024년에 비상 계엄령 선포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윤 씨는 “일반 시민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집회”라고 덧붙였다.
친구 4명과 함께 집회에 참석해 시민들에게 종합비타민을 나눠주던 이 모(56) 씨는 “두 아이를 둔 엄마인데, 다음 세대인 아이들을 위해 이 곳을 찾았다”라며 “그럴 리 없겠지만, 오늘 만약 부결된다면 윤 대통령의 탄핵이 이뤄질 때까지 계속 집회 현장을 찾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날 오전 진행된 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도 거셌다. 윤 씨는 “대통령 담화를 보고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라며 “여당에게 국정 운영을 맡긴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애초에 야당을 적으로 만들고 계엄을 선포해놓고 여당 얘기를 쏙 빼놓는 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30대 조 모 씨는 “솔직히 담화에서 나온 발언을 믿을 수 없고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믿고싶지 않다”라며 “이미 그들의 행동이 신뢰를 잃게 만들었는데 관련자와 동조 세력을 모두 처벌해야지만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여의대로 반대쪽에서는 보수단체도 결집을 시작했다. 보수단체 집회 참가자들은 한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달린 깃대를, 반대 손에는 ‘탄핵 저지’라고 써져 있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곳곳에서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구속을 촉구하는 외침도 들렸다.
탄핵 저지 집회에 나온 A(73) 씨는 “합법적으로 계엄을 선포한 것인데, 이 것을 가지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탄핵을 시도하는 세력이 있다”라며 “이 대표의 입에 정권을 퍼주는 행위가 기가 막혀 거동이 불편함에도 현장을 찾았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미아리에서 온 권영탁(73) 씨는 “계엄을 하려면 무기를 들고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어설프게 해서 아쉽다”라며 “윤 대통령을 향해 ‘내란수괴’라 하는데, 내란 세력은 민주당”이라고 비판했다.
인파가 몰리면서 크고 작은 소동도 벌어졌다. 이날 오전 국회의사당 인근에서 한 집회 참석자가 본인의 머리에 신나(페인트 희석제로 사용되는 인화성 물질)를 뿌리다 경찰에 저지당했다.
각 진영 집회 참석자 간의 갈등도 벌어졌다. 이날 오후 보수 측 집회에 참석한 한 노년 여성과 인근을 지나던 한 젊은 남성이 서로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이다 몸싸움을 벌이자 인근에 있던 경찰이 이를 제지했다. 한 진영에서 구호를 외칠 때마다 반대 진영에서는 야유를 쏟아내기도 했다.
한편, 이날 현장에는 집회 측 신고 인원 기준 26만여 명이 몰렸다. 경찰 추산은 최소 2만1000명이다. 경찰은 교통경찰 230명 등을 경찰력을 현장에 파견해 질서 유지에 나섰다. 서울교통공사는 인파가 몰리자 혼잡 해소 시까지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과 여의도역을 양방향 무정차 통과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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