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12·3 비상계엄’ 사태로 많은 시민이 ‘계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라우마는 1987년 민주화 이전 참혹했던 과거 기억 소환, ‘제2의 계엄’ 우려 등 다양한 형태로 시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달 3일 밤 10시 30분께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나이·성별·직업에 관계없이 시민들은 계엄령이 선포된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공연을 보고 귀가하던 길이었다는 박 모(64) 씨는 “계엄을 알게 된 순간 대학생 시절 신문 1면을 장식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앞 군인들의 사진이 생각났다. 장갑차·탱크가 일상적이던 옛 풍경이 연상되며 공포심이 몰려왔다”고 털어놓았다. 이후 박 씨는 일주일이 지난 10일에도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일상적인 장소에서 군인을 만나면 잔상이 어른거린다고 덧붙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은 곽 모(55) 씨는 “5·18 당시 금남로 인근 주택에 살았는데 총탄이 날아올까 솜이불로 창문을 막았던 기억이 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면서 “광주 사람들에게는 (이번 계엄 사태가) 진짜 트라우마”라고 전했다.
대학생인 유 모(24) 씨는 “실제 상황이라고 하니 손발이 떨리면서 군인들이 길거리를 장악하고 있진 않은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불안하고 무서웠다”면서 “지금까지도 밤에 계엄이 터질까 봐 자기 전 뉴스 시청이 습관이 됐다. 휴대폰도 진동 설정을 풀어두고 잔다”고 호소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계엄이 트라우마를 초래했다고 분석한다. 군사독재 시절을 기억하는 중년·노년층은 계엄 직후 즉각적이고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장은영 호남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앞서 국가 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과거에 겪은 유사한 기억을 머릿속에 연이어 떠올리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경계심이 높아지고, 특히 잠들 무렵 벌어진 탓에 잠잘 때도 제대로 이완하지 못해 수면 문제를 겪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연스럽게 회피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찾으려 하는데 모든 매체에서 계엄 관련 뉴스를 보도하기 때문에 회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전쟁·테러처럼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국가적 사건을 겪은 이들이 트라우마를 겪는 사례는 해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수연 성신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미국 9·11 사태 이후 언제든지 이러한 사태가 또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테러·전쟁·세계무역센터 관련 뉴스를 보면 심리상담을 받는 이들이 늘어난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뉴욕시에 따르면 9·11 사태 1년 후 정신건강 문제로 검진받은 환자 455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9.6%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전문가들은 심리적 문제로 인한 장기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정신건강에 집중할 것을 조언했다. 서 교수는 “내가 지금 무엇을 통제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규칙적인 시간에 잠을 자려고 노력하거나 잠이 오지 않더라도 수면을 방해하는 음주를 삼갈 필요가 있다”며 “증상이 심해진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대한수면연구학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는 황경진 경희의료원 신경과 교수는 “한번 깨진 수면 리듬은 바로 되돌리지 않는다면 만성 불면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만성불면증이 지속된다면 주간 졸림, 삶의 질 저하뿐 아니라 우울증·심혈관질환·치매 같은 인지 기능 저하의 위험성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조기에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스마트폰이나 TV는 잠들기 1~2시간 전부터는 시청을 금하고, 자기 전에는 몸과 마음을 이완시킬 수 있는 차를 마시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등의 시간을 가지면서 수면을 준비해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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