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방 한 가운데 커다란 수조가 있다. 수조 속에는 물이 가득 담겨 있고, 수조 앞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놓여 있다. 스크린 속에 눈 덮인 산의 모습이 드러나고, 손으로 노를 젓는 것처럼 물을 휘저으면 스크린 속 화면이 일렁인다. 물이 일렁일 때마다 화면도 함께 일렁이는 것. 지난 7월 세상을 떠난 비디오 아트 거장 빌 비올라(1951~2024)의 작품 ‘무빙 스틸니스: 마운트레이니어 1979’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백남준의 제자였던 빌 비올라는 여섯 살 때 호수에 빠져 익사할 뻔했던 경험을 살려 삶과 죽음, 의식의 흐름, 자연의 순한 등을 주제로 영상 작업을 해 왔다. 그는 세상에 비디오라는 매체가 등장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비디오를 다루기 시작했는데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는 최근 그의 1970년대 초기 비디오 작업부터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미국관 전시작, 2006년 작업까지 7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는 빌 비올라 사후 국내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이다. K3 전시관에 설치된 ‘무빙 스틸니스’는 그의 작업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이번 전시의 가장 핵심적인 작품이다. 관객이 물결을 일렁이게 하면 스크린 영상 속 산도 흔들린다. 흔들리던 산이 다시 원래의 ‘정지’상태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이미지로 구현된 산은 정적이고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토록 취약하고 불안정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안정감’을 형성한 산의 취약성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시간 역사 사실은 나약하다.
K1 전시장에 설치된 ‘인터벌(Interval)’은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 5점 중 1점이다. 한 방에 설치된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스크린 속 영상은 기이하다. 한 쪽에서는 벌거벗은 남성이 샤워실 안에서 자신의 몸을 조심스럽게 닦아낸다. 그 모습은 극단적으로 평온하다. 하지만 맞은편에서 재생되는 영상 속에는 신체의 모든 구멍을 노골적으로 가까이에서 찍은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보여진다. 영상 속 이미지는 점차 빠르게 재생되다 절정에 이를 때는 결국 검은색 화면이 된다. 그리하여 두 영상은 하나의 시공간으로 통합된다.
K1 전시장 로비에서 만나볼 수 있는 1973년작 ‘인포메이션(information)’은 비디오 테이프 리코더 녹화 중 입출력 데이터가 섞이며 발생한 오류를 통해 영상 매체의 속성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프랑스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지난 2011년 백남준아트센터 전시에서 소개된 바 있다.
빌 비올라는 1951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렬한 영상 설치 작업을 통해 인지 자아, 성찰의 방법을 고민했다. 이번 전시에 놓인 작품을 통해 관객은 각자의 인생 속 고유한 상수,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안정성’에 대해 다시금 고찰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은 대개 한 작품 당 10~30분 정도 소요된다. 전시는 내년 1월26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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