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사태는 6시간여 만에 막을 내렸다. 76년 동안 쌓아올린 헌정 질서가 헌법 수호 책무를 지닌 국가원수에 의해 흔들린 순간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3일 밤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해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대한민국을 불안정한 정치 후진국으로 추락시킬 뻔했다. 일부 국민은 “그나마 몇 시간 만에 어설픈 병정놀이 해프닝으로 끝나 더 큰 불행과 위기를 막았다”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국회 표결로 계엄을 수시간 만에 해제시켰으니 의회 민주주의 승리”라고 자평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자기 위안으로 무마하기에는 헌정을 뒤흔든 계엄 사태의 상흔이 너무나 크다. 특히 대한민국의 대외 신인도를 흔들고 경제·안보 리스크를 키운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최근 의회에 출석해 한일 및 한미일 협력 의지를 재확인하면서도 “한국은 정권 이동이 현저한 나라”라고 우려했다.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양국 신뢰 관계 유지를 확신할 수 없다는 일본인들의 ‘혼네(本音·속마음)’가 드러난 대목이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부 장관이 9일 일본을 방문해 “우리와 한국의 관계는 철통 같다”고 밝히면서도 한국 방문 일정을 건너뛴 것도 한미 간 안보협력 차질 우려로 번지고 있다. 경제 부문에서는 국제 신용평가기관 무디스가 “이번 사태가 빠르고 적시에 해소되지 않으면 다양한 위기로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행히 우리는 정부 수립 이래 수많은 위기들을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착시키면서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의 국가를 만들어낸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갖고 있다. 지금은 위기 때마다 오뚜기처럼 일어났던 대한민국의 저력을 전 세계에 다시 보여줄 때다.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는 교훈서 ‘채근담’의 저자인 명나라 학자 홍자성은 “역경과 곤궁은 호걸을 단련시키는 용광로이자 망치”라고 했다. 우리가 이번 시련을 단련의 계기로 삼는다면 한층 더 강건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불법 비상계엄 실행 과정에서 드러난 국정 시스템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일이 급선무다. 재발 방지를 위한 구조적 쇄신 없이 대통령 등 인적 교체로만 봉합하면 진정한 대외 신인도 회복은 요원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해 발간한 ‘복합위기 시대의 민주적 회복탄력성’ 보고서에서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는 민주적 회복력을 위해 특히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또한 “정치적 양극화는 정부가 필요한 구조 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우리 정부와 군도 이번 사태로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대통령실과 국방·치안 당국 등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뼈를 깎는 쇄신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통령의 오판이 국정 리스크로 번지지 않도록 제도적 안전핀을 확충하는 것이 시급하다. 대통령의 군 통수권은 유지하되 계엄 선포 요건과 절차를 보다 엄격하게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실의 국가안보실장·경호처장과 내각의 국방부·행정안전부 장관 등은 국회 추천을 받은 후보 중에서 인선하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대통령의 형사상 면책특권을 축소하고 그가 사법 수사 대상에 오를 경우 즉시 직무를 정지해 국무총리 등에게 권한대행을 맡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아예 헌법 및 정부조직법 등을 대폭 수술해 책임총리제를 도입하거나 유사시 국가원수 권한을 대행할 부통령제를 도입하는 방안 등도 연구해볼 만하다.
국정 혼란의 주범인 정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근본 대책 마련도 절실하다. 계엄 사태 전후에도 여야 정치권은 사생결단식으로 무한 정쟁을 벌이면서 국정까지 표류시켰다. 특히 여당인 국민의힘은 건강한 당정 관계를 통해 대통령의 수많은 오판과 대통령 부인 리스크를 바로잡기는커녕 두둔하거나 계파 간 싸움에 매몰됐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압도적 다수 의석의 힘으로 툭하면 정부의 정책 집행과 예산 편성을 가로막다 못해 무차별적 탄핵으로 행정·사법 마비 위기를 초래했다. 여야는 이제라도 극한 대립을 끝내고 정국 수습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아울러 선거·정당·국회 등 정치 전반의 시스템 대수술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질서의 회복탄력성을 되살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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