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형사재판소(ICC)의 아카네 도모코 소장이 재판소의 존폐 위기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중동 갈등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국제 전쟁 범죄와 관련한 ICC의 결정을 강대국들이 무시하고, 심지어 이런 결정을 내린 ICC에 위협을 가하는 지금 상황이 '법의 지배'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카네 소장은 12일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 요미우리신문에 보낸 기고글을 통해 "ICC는 현재 존속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ICC는 전쟁범죄 등 중대한 죄를 범한 개인을 소추하는 국제 재판소다. 일본을 포함한 124개국의 국가, 지역이 가입해있으며 미국, 러시아, 이스라엘은 제외돼 있다. 아카네 소장은 올 3월 일본인 최초로 ICC 소장에 올랐다.
아카네 소장이 말한 'ICC의 존속을 위협하는 사례'는 미국의 제재 움직임이다. 앞서 ICC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장관 등에게 전쟁 범죄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를 두고 이스라엘의 동맹국인 미국은 즉각 반발하며 하원에서 ICC 관계자에 대한 경제 제재와 미국 입국 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제재 법안을 통과시켰고, 상원에서도 초당파로 제재 법안을 가결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아카네 소장은 "현 단계에서 (상원의 법안이) 어떤 경제 제재가 될지는 모른다"면서도 "제재 대상이 ICC의 소수 직원뿐 아니라 복수의 검찰관이나 재판관, 그리고 소장인 본인으로까지 확대되고, ICC 그 자체가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황이 초래될 경우 미국 은행뿐만 아니라 유럽에 있는 은행도 ICC와 거래가 정지돼 재판소가 직원 급여조차 줄 수 없게 되고, 결국 활동 기능이 정지될 것이라는 게 소장의 우려다.
문제는 ICC의 활동이 중단될 경우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하마스 간부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에 대해 발부된 영장도 효력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카네 소장은 "국제사회에서 법치가 소홀해지고, 힘에 의한 지배가 횡행하면 전쟁범죄 피해자들은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된다"고 호소했다.
러시아 역시 ICC의 존립을 위협하는 '또 다른 축'이다. ICC는 지난해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한 푸틴 대통령 등에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러시아는 당시 영장 발부 재판관이었던 아카네 소장 등을 지명수배했다. 러시아는 ICC 관계자들에 대한 지명수배뿐만 아니라 지난해 대규모 사이버 공격도 감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카네 소장은 "ICC는 국가나 단체로부터 독립된 사법기관으로,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정치적 압력에 굴복한다면 그 자체가 재판소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ICC가 계속되지 못하면 무슨 일을 해도 이미 늦을 것"이라며 일본 등 가입국들이 이 위기를 간과하지 않고, 미국과 러시아 등을 압박하는 외교적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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