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 환경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등장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대외적으로 세계의 리더를 자처하던 미국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다. 대내적으로는 정치적 경쟁자나 상대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일이 일상이 됐다. 트럼프 당선인은 자신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이들의 생각을 바꾸기보다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방법을 정치 전략으로 삼았고 놀랍게도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4년 전에는 대선 결과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폭동이 일어났다. 민주주의 수호 국가를 자처하던 미국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사건이다. 정치적 갈등의 강도로 따지면 미국 사회는 한국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하지만 갈등 이면의 환경은 미국과 한국이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미국의 경제는 ‘예외주의’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강력하다.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13배 큰 선진국이 지난해 우리보다 2배 가까이 가파르게 성장했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최근 “현재 미국의 경제는 세계 주요 경제권이 부러워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경제적 비관론으로 유명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조차 “유럽은 박물관, 일본은 요양원, 중국은 감옥”이라며 현시점 미국 경제를 위협할 국가는 없다고 했다. 인공지능(AI)의 엔비디아, 양자컴퓨터의 구글 등 차세대 기술 혁신의 주인공이 모두 미국 기업인 점도 눈길을 끈다.
미국 정치가 깊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번영을 이끌 수 있는 배경에는 정치 갈등에 대한 마지노선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중국 정책을 놓고 싸우지 않는다.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미국 경제를 위협하는 국가로 규정하고 중국 기업의 미국 침공을 철저하게 차단한다. 화웨이·틱톡은 물론 중국계 비트코인 채굴 기업이 미국 공군 부지 옆에 있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기업의 육성과 혁신 지원도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윤리적 측면에서도 미국의 두 정당은 같은 편이라고 무작정 감싸지 않는다. 공화당은 자신의 혈통부터 성 정체성까지 거짓말을 하며 하원의원에 당선된 조지 산토스 의원을 지난해 제명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법무장관 후보로 지명한 맷 게이츠 전 하원의원은 같은 당 상원의원들의 반대 압박에 사퇴했다.
반면 대한민국은 헌정 사상 세 번째 현직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초유의 상황에 직면했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과연 우리가 갈등에 마지노선을 두고 있었는지 성찰해야 한다. 미국 조야가 중국에 대해 초당적 합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불변할 외교 원칙이 있는가. 당리당략을 넘어선 공통의 윤리적 기준이 있는가.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수준까지 치달은 것은 아닌가.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는 야당을 국가 문란 세력으로 규정하고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탈정치의 정점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정부 관계자 및 검찰을 향한 20여 차례의 탄핵, 나라 살림을 재물로 바치는 예산 감액 등 현 상황을 초래하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피해는 온전히 국민이 감당하게 됐다. 당장 다음 달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미국의 새 행정부와 협상할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 뉴욕에 나와 있는 한 관료는 “새로운 지도자가 들어서기 전에 트럼프 정부가 관세 협상부터 요구하는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다”며 손사래를 쳤다.
정작 더 큰 위험은 새로운 지도자의 탄생 이후가 될 수 있다. 지금처럼 갈등의 하한선이 없는 한 정치적 갈등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대에 대한 정치적 보복이 따를 수 있다. 경제성장률이 둔화하고 주요 기업들의 기술 혁신 소식도 뜸한 와중에 갈등과 증오의 정치가 지속된다면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무한 갈등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식 정치 문화의 대가는 위기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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