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에서 폐암 진단을 받은 환자가 수술을 받으려면 9개월 뒤에나 가능하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합니다. 환자들이 받아야 할 시술 자체가 안 되는 상황도 허다하고요. 현실은 이런데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생각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대표)
의대 정원 증원 반발에서 시작된 의정 갈등의 장기화로 의료 공백이 11개월째 이어지고 있지만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환자들의 가슴만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역·필수의료 강화 등 의료개혁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동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이다. 현재 상태가 지속되면 의료 공백이 내년 상반기 이후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정부와 의료계 안팎의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양측이 머리를 맞대고 의정 갈등의 핵심 고리인 “의대 정원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당장 대학 입시가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에서 현실적으로 되돌리기 어려운 2025학년도 의대 정원에 매몰되기보다는 2026학년도 의대 정원과 의료 공백을 막기 위한 수습책을 찾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년 의대 모집정지’만 외치는 의사단체
16일 정부와 의료계 등에 따르면 국회에서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후 의료계에서는 2025학년도 의대 모집 정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는 22일 의사 전 직역이 참여하는 전국의사대표자대회를 열어 정부의 의료개혁을 규탄한다. 의협 비대위는 “정부의 근거 없는 의대 정원 증원으로 인한 의료농단·교육농단을 막기 위해 2025년 의대 신입생 모집 역시 즉각 중단하고 붕괴된 의료 현장이 정상화될 수 있도록 끝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2025학년도 대입 전형이 상당 부분 진행된 상황에서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미 39개 의대가 수시모집에서 최초 합격자 3118명을 선발해 18일까지 등록을 받고 있다. 정시모집까지 시작되면 의료계 일각에서 주장해 온 수시모집 미등록 인원을 정시모집으로 이월하지 않는 방식의 모집 인원 조정도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의대 정원을 되돌릴 경우 수험생 혼란이 불가피해 상당한 부담을 감수해야 하지만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평가다.
이에 따라 현실적으로 2026학년도 의대 정원 문제로 초점을 옮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대표는 “시간이 없다고 말한 것도 한참이 지났다”며 “이제는 의대 정원 문제는 별개로 봐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양측이) 협상 테이블에 나와서 요구 사항을 말할 때”라고 말했다. 정부 역시 대학별로 증원된 인원에 따른 교육 차질이 발생하지 않게 준비하면서 의료 현장을 떠난 전공의들이 돌아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때다. 내년 의대 예과 1학년은 증원된 신입생에 올해 진급하지 못한 학생까지 합해서 최대 7500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학교마다 공간 부족 등으로 원활한 학사 운영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교육부는 의대를 관할하는 국을 별도로 신설해 종합 관리·대처한다는 계획이다.
‘스톱’ 의료개혁, 정권 안 타는 의제 살려야
지역·필수의료 강화를 위한 의료개혁 논의도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는 이달 말 2차 실행 방안 발표를 앞두고 19일 비급여·실손보험 개선 방안 공청회를 열 예정이지만 개최 여부가 불투명하다. 특위는 4월 출범 이후 상급종합병원 구조 전환을 10월부터 개시한 것을 비롯해 비급여·실손보험 개선, 수가 등 보상 체계 현실화,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 등을 논의하고 있다. 모두 필수·지역의료를 살리기 위해 필요하다는 게 시민사회단체, 소비자단체, 외부 전문가들의 일치된 입장이다. 노연홍 의료개혁특위 위원장은 “의료개혁은 국민 생활과 직결되는 의제로 상황이 안정되면 계속 가야 한다”며 “8월 발표한 1차 실행 방안은 물론 앞으로 발표할 2차 실행 방안도 계속해야 하는 의제”라고 말하며 의료계 복귀를 호소했다.
특히 의료개혁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도 지지하는 정책이 다수 포함돼 있어 이른바 정권을 타는 정책도 아닌 만큼 국민을 위해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한 번 논의가 진행된 개혁 과제는 정부가 바뀌어도 이어질 것”이라며 “야당도 큰 틀의 의료개혁에 찬성할 뿐 아니라 공공의대·지역의사제 등 그간 주장한 정책이 있으니 의제 자체가 소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