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하반기 가장 의미있는 전시로서 필자는 서울시립미술관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전시와 국립현대미술관 ‘접속하는 몸-아시아여성미술가들전’을 꼽는다. 이 두 전시의 공통점은 한국과 아시아 지역에서 맹렬하게 활동했던 여성미술가들의 작품을 살펴본다는 것인데, 특히 그들이 작품을 통해 메시지를 담으려는 노력만큼이나 작업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를 알게 되면서 더 감동을 받았다. 식민지와 전쟁을 치루었던 한국에서 여성미술가들의 삶과 작업 역시 20세기 후반기라고 해서 더 나아진 것 없이 여전히 열악한 현실 속에 처해있었다. 그나마 199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공산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냉전 체제가 종식되어 새로운 문화재편의 시대가 도래하였으며 한국에서는 1980년대 독재시대가 종식됨으로써 민주화시대가 시작되었고 억눌렸던 개인의 자유로운 목소리가 나오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보장되면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 사회, 여성 차별의 사회적 관습 등을 탈피하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면서 문학, 영화를 필두로 하여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이 깨우친 자기성찰과 자의식에 입각하여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삶과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꿈을 향한 도전을 다룬 작품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하민수는 1961년 출생한 한국 베이비부머 세대로서 독재정권과 급속한 경제압축성장기 속에서 자라난 미술가이다. 1980년대 중반 사회적으로 다양한 욕구가 분출되던 시기 일군의 30대 초반 미술가들은 기존의 획일화되었거나 거대담론을 지향하는 미술이 아닌 다양한 실험적 성격을 모색하였다. 하민수는 그 중 한 명으로서 1985년 다양한 재료와 매체를 이용하여 표현성이 드러나는 설치, 입체, 영상작업을 펼치는 ‘메타-복스(Meta-Vox)’를 결성하면서 미술가로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1989년까지 지속되었던 메타복스의 활동은 당시 다양한 의견과 목소리를 냈던 소그룹의 대표주자로서 미술의 통념적 관습을 일탈하는 경향을 추구하여 오늘날 재조명되고 있기도 하다. 하민수는 메타복스 활동 중 캔버스에 유채와 같은 전통적인 회화로서 작업이 아니라 오브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관심을 두었으나 곧이어 결혼과 출산을 통해 작업에 매진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작가는 작업에 필요한 시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건 속에서 보다 절실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대학시절부터 배웠던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생각하여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있어서 스스로 어떠한 규정을 짓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런 상황 아래 하민수는 1993년 ‘30캐럿’이라는 여성작가들만의 그룹을 결성하였는데 여성의 현실과 자아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서 여성의 입장에서 본 사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선언문에서 30캐럿이란 ‘꾸준한 작업 속에서 내적 성장을 그치지 않는 30대 여성미술가들’을 의미하며 자신들의 시선으로 억압된 사회의 차별과 제약 등을 해석하며 여성의 정체성과 자아발전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1990년대 초반 대중문화 속에서도 문학, 영화 등에 있어서 여성주의가 대거 등장한 시점에서 1990년대 초반 페미니즘 계열의 기획전이 다수 개최되어 한국미술계에서 페미니즘 경향을 확고히 한 시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전시는 ‘여성, 그 다름과 힘’ 전시인데 1994년 ‘한국미술관’(당시 관장 김윤순)과 미술관 병설 ‘갤러리한국’에서 개최되어 근대미술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여성화단에서 활동을 펼쳐온 여성미술가들이 참여하였다.
작품 ‘날개, 갇혀진 비상’은 하민수가 ‘여성, 그 다름과 힘’ 전시에 출품하기 위해 제작한 것인데 여성미술가로서 현실과 부딪히는 자아에 대해 되돌아보고자 만들었다. 하민수는 이 작품을 통해서 서정적이고 감성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민중미술 속의 여성주의도 아닌, 여성의 권리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태도를 지니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작가는 이 전시의 의도와 취지를 여성이 특별한 힘을 가져서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성의 역할이 동등하며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힘이 다르다는 것을 시각화하였다. 이 작품에 담은 작가의 이야기는 날개를 달고 비상(飛上)하고 싶어하는 자아를 인지하지만 여전히 갇혀진 현실에 머물러 있고 그것을 깨고 나오기까지 상당한 갈등을 느낀다는 것이다. 당시 작가는 결혼하고 세 딸들을 키우는 상태라서 이상과 현실의 다른 갈등을 더욱 크게 절감하던 시기였다. 외할머니, 어머니와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기억과 결혼 후 세 딸을 키우면서 느낀 여성으로서 과거,현재,미래의 모습도 작가에게는 강렬한 창작동인이었다.
이 작품은 한복천을 이용해 천의 문양이나 형태를 만들어 재봉틀로 크게 이어 붙인 작품이다. 작가는 소묘 드로잉을 좋아하니 그것을 재봉틀로 박아보자는 아이디어에서부터 시작하여 바느질 작업을 93년부터 채택했는데 처음에는 캔버스천을 이용했지만 점차 다른 천을 사용하게 되었고 비단과 같이 얇은 천도 적극 사용하였다. 얇은 천 위를 누비고 다니는 바느질 선을 재미있다고 여겨 재봉틀 작업과 손자수 등 다양하게 작업하였는데 특히 재봉틀 자수작업은 수없이 선을 긋는 가운데 속도감을 느끼고 일종의 시간의 축적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게다가 재봉틀 작업이 집 안에서 매일매일 반복하는 작가자신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 겹쳐진 실선들이 재봉틀을 선택한 이유였다고 작품관련 인터뷰에서 설명하였다. 이후 이 작품은 1997년 국립극장에서 오태석 연출의 ‘태’ 연극의 메인 이미지로서 극장 건물을 감쌌던 대형 작품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태’ 작품은 조선시대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핏줄에 대한 끈질긴 생명력과 힘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날개- 갇혀진 미상II’의 웅크렸으나 폭발하는 내면의 에너지가 응축된 작품이미지는 연극 상 어린 생명을 둘러싼 산 자와 죽은 자들 간의 갈등관계와 등장인물의 욕망을 잘 대변하였다. 하민수는 여전히 작업 중이며 최근에는 고통받고 있는 여인의 삶에 주목하여 위안부를 다룬 작품을 제작, 전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통받는 삶이란 여기에도 있고, 거기에도 있고, 저 너머에도 있기는 하지만 잘 극복해내면 하늘을 훨훨 날라다니는 기쁨을 만끽하려는 희망으로 새와 나비를 주된 형상으로 삼고 있다. 삶과 예술을 동일시하여 일구어나가는 작가의 몸짓은 스스로 틀을 깨어 하늘로 비상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여겨지나 작가의 작품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힘을 가지는 이유는 아직도 새와 나비가 제대로 된 비상하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지 않을까 반문해본다.
하민수의 ‘날개-갇혀진 비상II’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내년 3월3일까지 개최되는 ‘접속하는 몸-아시아여성미술가들’ 전시에 출품됐다.
★하민수: 1961년 서울 출생으로 198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6년 동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하였다. 1985년 국립현대미술관 앙데팡당전을 시작으로 하여 젊은 세대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5년 메타복스(Meta Vox) 창립멤버로서 1988년까지 전시를 개최하여 1980년대 새로운 한국현대미술의 소그룹 경향을 이끌었으며, 1993년 30캐럿 창단 멤버로서 30대 여성작가로서 억압된 사회 통념에 반기를 드는 작품활동을 펼쳐왔다. 1994년 여성, 다름과 힘전, 1999년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 2002년 ‘또다른 미술사-여성성의 재현’전 등에 출품하였다. 2010년대 들어와서 시대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펼치기 위한 예술가 그룹 ‘아트제안’을 결성하여 세월호 참사, 위안부 문제를 다룬 작품제작과 전시를 진행하였다.
▶▶필자 류지연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품수장센터운영과장이다.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해 전시기획, 미술관교육, 소장품연구, 레지던시, 서울관·청주관 건립TF 등 미술관에 관한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며 29년째 미술관을 지키고 있다. 영남대 미학·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영국 에식스대학교(Essex University)에서 미술관학(Gallery Studies)을 공부했으며, 서울대에서 미술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겸임교수(2022~2023)를 비롯해 인천시립미술관·대구미술관 자문위원, 서울문화재단 전시 자문위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브 자문위원, 성북문화원·대안공간 공간291 자문위원, 증도 태평염전 아티스트 레지던시 심사위원 등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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