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재직 중이거나 특정 근무 일수를 충족해야만 지급되는 조건부 정기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이 통상임금의 기존 요건인 고정성을 폐기하는 등 11년 만에 판례를 바꾸면서 근로자의 수당·퇴직금 등 범위가 크게 넓어진다. 기업들은 연간 7조원에 가까운 추가 인건비를 부담해야 하고 이를 둘러싼 노사 간 소송·갈등 등도 이어질 수 있어 쓰나미급 후폭풍이 예상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19일 한화생명보험 전현직 근로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소송 상고심에서 전원 일치 의견으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현대차 근로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임금 소송에 대해서는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두 소송에 대한 1·2심 판결이 엇갈린 데 따른 것이다.
이날 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통상임금의 요건인 ‘고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근로자가 받을 수 있는 수당·퇴직금 규모의 기준이 되는 통상임금은 ‘소정 근로(노사 합의 근로시간)의 대가로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금품’을 뜻한다. 기존 판례에서는 각종 수당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할지 여부를 3대 원칙인 ‘정기성·일률성·고정성’에 따라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들 기준 가운데 ‘고정성’이 통상임금의 요건으로 볼 법률적 근거가 없다면서 폐기했다. 특히 임금 지급 여부, 지급 금액의 사전 확정을 의미하는 고정성으로 인해 통상임금 범위가 부당하게 축소되는 등 근로자들에게 법률이 정한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근로자가 소정 근로를 온전하게 제공하면 그 대가로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하도록 정해진 임금은 조건의 존부나 성취 가능성과 관계없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재직 요건에 따라 지급되는 정기 상여금에 대해서는 “근로자가 재직하는 것은 소정 근로를 제공하기 위한 당연한 전제”라며 “재직 조건이 부가돼 있다는 사정만으로 그 임금의 소정 근로 대가성이나 통상임금성이 부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판결에 노사는 희비가 엇갈렸다. 민주노총은 “통상임금에 대한 복잡성과 혼란을 가져온 현실을 바로잡는 바람직한 판결”이라며 환영했다. 반면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재직자 조건 등이 부가된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산입하지 않기로 한 노사 간 합의를 무효로 만들어 향후 소송 제기 등 현장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정치적 혼란, 내수 부진, 수출 증가세 감소 등 기업 경영 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재무적 부담까지 떠안게 됐다”며 “기업들의 경영 환경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