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월, 디지털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책이 출간됐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미디어랩 교수로 재직 중이던 니컬러스 네그로폰테가 쓴 ‘디지털이다(Being Digital)’다. 네그로폰테 교수는 책에서 날로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이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을 대체하면서 사회·산업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제목에 붙은 ‘Being’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디지털화가 기술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활·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이라는 그의 전망은 30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 적중했다. 초고속 인터넷의 등장과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초연결 사회가 도래했고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다양하고 혁신적인 기업과 서비스가 등장했다. 아마존·애플·엔비디아·구글·마이크로소프트·메타·테슬라를 일컫는 ‘매그니피센트 7’이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빅테크 반열에 올라섰다.
네그로폰테는 디지털 기술이 가져올 변화를 낙관적으로 보면서도 부작용을 우려했다. 지식재산권 남용, 프라이버시 침해, 소프트웨어·데이터 해킹과 같은 사이버 보안 문제 등이다. 이들 부작용은 지금 전 세계가 함께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디지털 기술의 이해와 습득 여부에 따른 격차 문제와 함께 과몰입과 중독도 심각한 이슈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태블릿PC와 같은 기기를 접한 1020세대, 이른바 ‘디지털 네이티브’의 디지털 중독 문제는 더 이상 방치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청소년의 경우 뇌가 덜 발달한 상황에서 숏폼(짧은 영상)과 같은 자극적인 콘텐츠와 소셜미디어의 유해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접하면 사고력·판단력 저하는 물론 사회성 발달에도 악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최근 영국 옥스퍼드대 출반부가 일반인 3만 7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를 통해 올해의 단어로 ‘브레인 로트(brain rot)’가 선정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온라인 콘텐츠를 과다하게 소비하면서 정신적 상태와 지적 능력이 쇠퇴·약화되고 있는 세태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다.
청소년들의 디지털 중독, 특히 소셜미디어 과의존 현상이 심화하자 각국 정부가 대응에 나섰다. 호주 상원은 지난달 말 16세 미만 청소년과 어린이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 소유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등 33개 주 정부는 SNS가 과도한 중독성으로 청소년의 정신 건강에 피해를 주고 있다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메타플랫폼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유럽연합(EU)도 SNS의 중독 유발 가능성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타깃이 된 메타플랫폼은 9월 청소년 보호 조치를 내놓고 영미권 국가에서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18세 미만 이용자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청소년 계정’으로 자동 전환되고 부모는 ‘감독 모드’를 통해 자녀의 SNS 사용 시간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음 달부터 시행된다. 국회에도 청소년의 SNS 사용을 제한하는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각국 정부의 입법 노력과 빅테크들의 자율 규제로 인해 청소년들이 디지털 세계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정부와 기업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학교·가정에서 디지털 중독·과의존을 방지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이 강구돼야 한다. 디지털 중독·과의존 문제는 비단 청소년뿐 아니라 성인들의 정신 건강에도 위험하다.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를 안 쓸 수는 없으니 가급적 사용 시간을 줄이고 휴식을 통해 정신적·신체적 독소를 빼내는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를 해야 한다. 인터넷에는 ‘침실에는 디지털 기기를 갖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등 디지털 디톡스 방법이 올라와 있다. 정보통신기술 기업들과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청소년 디지털 디톡스 캠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계엄의 밤을 지새우고 탄핵의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쏟아진 뉴스를 소비하느라 지친 이들이 적지 않다. 연말 연시 디지털 디톡스를 통해 고단한 심신을 치유해보는 것은 어떨까. 네크로폰테는 ‘비트(bit)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썼는데 디지털 디톡스는 영혼을 맑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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