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도 대입 수시모집에서 의대 최초 합격자의 등록포기가 속출하는 가운데 의료계 전 직역 의사 대표자들이 22일 "내년 의대 모집을 최대한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를 무시할 경우 2026년 의대 모집을 중지하라는 차선책도 내놨다. 현실적으로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가 불가능해진 만큼 '전면 철회'를 요구하던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대한의사협회(의협)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이날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에서 개원의·봉직의·의대 교수·전공의 등이 참여한 가운데 ‘의료농단 저지 및 책임자 처벌을 위한 전국의사대표자대회’를 열었다. 임현택 전 회장 탄핵 이후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고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가결 후 의료계 전 직역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들은 이날 비공개 회동에서 채택한 결의문에서 정부의 의료개혁을 ‘의료 계엄’이라 규정하고 "합당한 근거와 절차 없이 정부가 일방적으로 진행한 의대 2000명 증원은 취소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2025년 의대 모집은 최대한 중단해야 한다"며 "정부가 이런 경고를 무시한다면 2026년 의대 모집을 중지하고 급격히 증가한 의대생들을 순차적으로 교육시키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필수의료가 망가진 것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한 정책 실패의 결과"라며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등 지난 2월부터 정부가 독단적으로 추진한 의료개혁 방안을 철회해야 한다"고 밝혔다.
사직 전공의들은 지난 2월 병원을 떠나며 제시한 7대 요구안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전공의 단체인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가 발표했던 7대 요구안은 △의대 증원 계획 및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전면 백지화 △과학적 의사 수급 추계 기구 설치 △수련병원의 전문의 인력 채용 확대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부담 완화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전공의 대상 부당한 명령 전면 철회 △업무개시명령 전면 폐지 등이다. 그 중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를 의미하는 '의대증원 계획 및 필수의료 정책패키지 전면 백지화' 요구가 의정 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로 꼽혔다.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여전히 내년도 의대 모집정지를 요구하고 있지만 의료계 일각에서는 현 시점에서 내년도 의대 정원 증원분을 줄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시각이 많다. 이미 각 대학이 지난 13일까지 수시모집 최초합격자를 발표한 데다 19일부터 미등록 인원에 대한 추가 합격자 발표를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26일까지 충원되지 않은 인원은 정시로 이월되는데, 각 대학은 미충원 이월을 포함한 최종 정시 모집 인원을 28~30일 발표한다.
이에 수시 미충원 인원을 정시로 이월하지 않는 것이 의대 증원 효과를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거론되고 있다. 의사 출신인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의사대표자들과 만나 "이제라도 대통령 권한대행, 여야와 의료계는 머리를 맞대야 한다"며 "수시 미등록 인원을 정시로 이월하지 않는 방안 등 가능한 긴급 처방들을 찾아 합의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의대 증원의 여파로 전국 의대 수시 최초합격자의 미등록률은 예년보다 높았다. 내신이 우수한 학생들이 지방권을 포함한 의대 지원에 집중하면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등 최상위권 대학에서 수시 최초합격자의 등록 포기가 속출했고, 의대에서도 중복합격으로 인한 이동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내년도 의대 정원 조정 마지노선인 정시모집을 앞두고 수시 미충원 이월 등 현실론에 한층 힘이 실릴 수 있다는 관측이다.
박형욱 의협 비대위원장(단국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교수·대한의학회 부회장)은 대회 직후 브리핑에서 "오늘 논의의 핵심은 선배 세대가 전공의와 의대생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그는 "전공의와 의대생의 투쟁이 오늘날까지 이 안건이 이어지게 된 원동력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며 "의협 비대위뿐 아니라 차기 집행부 역시 전 직역이 하나로 모여 투쟁 방안을 만들어 나가자고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당장 이번 달 말부터 시작되는 의대 정시 모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료계는 교육부 장관 설득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박 위원장은 "2025학년도 의대 정원 문제는 우리나라 법체계상 기본적으로 행정부에서 결정해야 할 문제인 만큼 지난 19일 국회 교육위원장, 보건복지위원장과의 간담회에서 교육장관 등 정부를 설득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며 "국회 교육위원장과 복지위원장 주선으로 내일(23일) 교육부와 비대위가 만난다. 이후 공식적인 여야의정 협의체나 공론화위원회 등 의견을 모아 추진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에는 안 의원 외에도 국회에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인 이주영 개혁신당 의원이 함께했다. 이 의원은 "지금 정시모집을 중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각 의과 대학에 그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라며 기성 의사들을 향해 "'우리(학장, 교수)가 책임질 테니 법적인 문제부터 교육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우리 학교에 관한 소송은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학생들 앞에 나서달라"고 말했다. 또 교수들을 향해 "전공의들이 돌아올 때 전공의가 원하던 공부를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전문적으로 다시 잘 할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해달라"고 요청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