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국 중 가장 빠르게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나라, 그 대한민국은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작금의 현실과 사태로 볼 때 디스토피아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이니 말이다.
특히 농촌은 더욱 그러하다.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에다 기존 인구의 도시 유출까지, 거기에 문화와 교육과 의료와 복지의 사각지대가 너무 많아 생활의 불편 요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래 농촌은 자연친화적 환경과 더불어 상생의 공동체가 살아있는 우리네 삶의 현장이었다. 농촌은 단순히 도시의 배후지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적 삶의 구현공간, 도농상생의 융합공간 그리고 기후위기 대응의 대안공간이 될 수 있는 곳이다. 농촌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으나 우리가 잊고 있던 ‘유토피아’가 될 수 있는 곳이다.
농촌유토피아란 먹고 사는 걱정이 없고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한 농촌을 말한다.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문화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며, 개인의 자아실현을 향한 노력이 공동체의 발전과 자연스레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농촌이 이런 유토피아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일자리, 주거, 의료, 복지, 교육, 문화 등의 융복합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도시에서 이런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농촌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 충남 홍성의 홍동면이나 경남 함양의 서하면이 유토피아 성공사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런 유토피아를 만드는데 있어 관(官)이 아니라 민(民)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소위 관제 유토피아는 성공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깨어있는 민이 창조적 상상력으로 기획하고 지역주민이 공동체로 함께 할 때 유토피아는 성공할 수 있다. 물론 민이 먼저 씨앗을 심고 발아를 시키면 관이 도와주어야 한다. 이른바 선민후관(先民後官)이다. 이것이야말로 민관협치의 정석이고 또 지속가능한 모델이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스코틀랜드의 핀드혼 공동체나 호주의 크리스탈 워터스 그리고 인도의 오로빌 공동체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가까이는 일본의 가미야마 마을이 있다. 모두 민이 중심이 되어 만들고 성공한 곳이다.
그러면 유토피아(Utopia)와 유토피아(有土彼我)는 무엇이 다를까? 토머스 모어의 ‘Utopia’는 ‘어디에도 이루어질 수 없는 곳’, 즉 이상향이다. 반면 ‘有土彼我’는 ‘당신과 나 사이에 흙(자연)이 있는 곳’, 바로 농촌이다. 농촌이되 그냥 농촌이 아니라 ‘사람이 살만한 유토피아적 요소를 갖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런 농촌형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2020년에 농촌유토피아연구소가 만들어지고 이어 2021년에 농촌유토피아대학원이 만들어졌다.
시대정신에 맞는 창조적 상상력으로 농촌을 혁신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인재를 육성 중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2022년부터는 농촌유토피아 선도마을을 곳곳에 만들고 있다.
이런 농촌형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공동체 마을이 스페인에 있는, 인구 2700명의 ‘마리날레다’라는 곳이다. 이곳을 소개한 ‘우리는 이상한 마을에 산다’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우리는 우리가 미래에 원하는 것을 지금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내일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오늘 시작하면 그것이 가능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본보기가 됩니다. 정치를 하는 다른 방법, 경제를 하는 다른 방법, 함께 사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 다른 사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본보기 말입니다.”
또한 “유토피아는 근거 없는 환상이 아닙니다. 유토피아는 사람들이 가진 가장 고귀한 꿈입니다. 투쟁을 통해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평화의 꿈, 즉 공동묘지의 평화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평등과 평화를 이뤄내는 꿈입니다. 간디가 말했듯이 평화는 단순히 폭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생산하는 자원과 부를 소수가 빼앗아 가지 않고 그것이 다시 노동자에게로 오는 꿈입니다.”
온갖 어려움에도 타율과 경쟁이 아닌 자율과 협동의 가치로 마리날레다는 유토피아를 완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원하는 것을 내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실현해 낸다는 것이다.
저명한 미국의 교수이며 작가이자 활동가인 벨 훅스는 “만일 우리가 닫힌 시스템에서 열린 공간을 발견하고도, 거기에 들어갈 노력을 즉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감옥에 가두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아무리 디스토피아 세상이라 하더라도 틈은 있게 마련이다. 그 틈을 비집고 새로운 공생공락의 유토피아 세상을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 우리나라에서도 농촌을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한 민간 차원의 움직임이 다양한 형태로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마을공화국을 만드는 운동가들도 있고, 융복합 농촌마을을 계획하는 전문가들도 있고, 귀농귀촌 생태마을을 건설하는 도시농부들도 있으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마을을 꿈꾸고 있는 청년들도 있다.
‘어디에도 없는 곳’ 유토피아(Utopia)는 이상향에 불과하지만,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곳’, 유토피아(有土彼我)는 바로 우리 사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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