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가고 있다.
수면에서 굴절된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중력이 물의 부력을 이기는 임계 아래로.
더 내려가고 있다. 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中)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는 폭력의 무게와 억압의 깊이를 이렇게 전하고 싶었던 걸까.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임계 아래 어둠’에서 공포감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칼럼은 녹록치 않은 삶 속에서도 해돋이를 바라볼 때의 그것처럼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이 맞다. 아무리 나라와 가계의 살림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더라도, 수년 동안 지속된 혼탁한 정세를 풀어낼 약간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더라도, 믿기지 않는 참사에 비통함 뿐이라도, “우리는 저력이 있으니 한번 해보자고” 파이팅 넘치게 주장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거장의 문장을 빌어 와 폭력과 어둠으로 칼럼의 첫 머리를 채웠다.
‘혼돈’이라고 하기에도, ‘비현실적’이라고 하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2024년의 마지막 달이 이제 막 지났을 뿐이고, 새해 아침이 밝았더라도 세상은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 ‘아수라’의 시간은 을사년 올해 ‘푸른 뱀’처럼 더욱 강렬하게 다가올 것이다. 주술에 빠진 대통령의 광기 어린 선택이 몰고 온 후폭풍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탄핵 심판으로 느닷없이 울린 조기 대선의 출발 신호와 함께 대한민국의 분열음이 커지고 있다. 정부 기관 곳곳에 담벼락처럼 쌓이는 화환을 가운데 두고 진영 간 극악스러운 대치가 치열해질 것이다. 도사와 법사, 보살의 휴대폰에서 튀어나올 말들에 경악하는 한편에선 포퓰리즘으로 무장한 제왕적 대통령과 거대 여당의 탄생 가능성에 몸서리를 칠 것이다.
정치의 부재 속에 누구도 국정의 방향타를 책임 있게 붙잡고 있지 못하기에 국가 경제와 민생의 벼랑 끝 위기는 쉽사리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대행 체재라는 미증유의 길을 걷고 있다.
국정의 마비 상태가 종식된 후에도 후유증이 오래 남을 것이다. 또 다시 ‘조작’이나 ‘보복’과 같은 섬뜩한 단어들이 넘쳐날 수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통령의 선동에 ‘치유’와 ‘통합’이라는 가슴 벅찬 단어는 앞으로도 오랜 세월 우리 것이 될 수 없기에 절망스럽다.
그래서 나는 2024년 12월의 그날로 돌아간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
국회에 내려앉은 헬리콥터와 무장한 계엄군. “문짝을 도끼로 문수고” “총을 쏴서라도” “제2, 제3의 계엄”과 같은 망상 속 대통령의 명령. 쏟아지는 증언과 증거에도 내란 수괴 피의자를 여전히 붙들고 한 줌의 권력을 지켜보려는 무리들. 그리고, “1년만 지나면 다 잊고 찍어 준다”는 검은 속내와도.
그렇게 1948년 10월 25일 여수·순천의 첫 비상계엄부터 1979년 10월 18일 전국에 선포된 열 다섯 번째 계엄까지 수백 만의 무고한 희생으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46년 만에 속절없이 무너뜨린 모든 형태의 폭력과 작별하지 않는다.
소설의 배경이 된 ‘제주 4.3사건’. ‘학살의 역사’에 1948년 11월 17일 선포된 두 번째 계엄이 있었다. 작가는 ‘척결’이라는 목적으로 자행된 폭력의 장면 하나 하나와 마주한다. 그리고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헤집어 내듯 고통스럽게, 그날의 진실들을 하나하나 꿰어내 전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2024년을 기억해야만 하는, 불안 속에 시작되는 2025년을 마주하고 이겨내야 하는, 새해 아침이 슬프고 비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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