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에서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 보이시죠? 심장 뒤쪽에서 촬영한 매핑 결과 4개의 폐정맥 모두 전기적으로 격리됐고 별다른 부작용도 없었습니다.”
“(시술이) 한 시간도 안 돼 끝났다면서요? 이렇게 금방 끝날 걸 괜히 주저했나 싶더라고요.”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정보영 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 교수에게 심방세동의 최신 치료법인 ‘펄스장 절제술(PFA·Pulsed Field Ablation)’을 받은 권모(53·남)씨가 밝은 표정으로 의료진을 맞이했다. 매핑은 외부에서 연결된 전극 카테터를 이용해 심장을 3차원적으로 입체화하고 전기 파동의 양상을 관찰하는 방법이다. 산소가 풍부한 혈액을 폐에서 심장으로 가져오는 4개의 폐정맥이 선명한 빨간색을 띠었다는 건 시술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의미다.
◇ 이유 없이 ‘두근두근’…혈전이 뇌혈관 막아 뇌졸중 일으키기도
권 씨는 2003년 당시 32세의 나이로 심방세동 진단을 받았다. 심방세동은 부정맥의 일종으로 심장 내 불규칙한 전기신호가 분당 600회 정도의 빠르기로 발생해 심방이 불규칙하게 떨리면서 나타난다. 질환 자체로도 피로감·가슴 두근거림·숨 가쁨·어지럼증 등을 유발해 일상생활에 불편을 주지만 더욱 큰 위험은 혈전에 의한 합병증에서 비롯된다. 심방이 정상적으로 수축하지 못한 채 부르르 떨리는 상태로 움직이다 보니 내부의 혈액 흐름이 느려지고 정체되는 부분이 생기는데, 이 과정에서 혈전이 형성되기 쉽다. 문제는 혈전이 갑자기 떨어져 좌심실과 대동맥혈관을 통해 이동할 때 발생한다. 혈전이 뇌혈관을 막아 혈액 공급이 중단되면 뇌세포가 손상되거나 죽게 되어 뇌졸중 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다른 장기로 이동하면 말초혈관 폐쇄를 일으킬 수 있고 심하면 장기 손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심방세동 치료의 궁극적인 목표는 심박동을 정상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항부정맥 약제에 저항성을 보이거나 약제를 사용하기 힘든 환자의 경우 시술을 고려하게 된다. 정 교수는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 외에 심전도검사 결과가 확보되면 심방세동으로 진단한다”며 “국내에서는 심방세동 진단 이후 6주 이상 항부정맥 약제를 복용해도 재발 소견이 있을 때 건강보험 적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권씨의 경우 2~3년 전부터 발현 빈도가 잦아졌는데 약물치료에도 불구하고 두근거림, 답답함 등 지속적인 부정맥 증상을 보여 시술이 필요했다는 설명이다.
◇ 미국·유럽서 심방세동 ‘대세’ 치료 등극…신의료기술 허가로 韓 사용 길 열려
기존에는 약물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심방세동을 치료할 때 고주파로 열을 가해 심방세동 발생 조직을 절제하는 고주파 전극도자 절제술과 냉동 열에너지를 이용하는 냉각절제술이 주로 쓰였다. 두 방법 모두 식도, 횡격막 신경 등 심근의 주변 조직에 열에너지가 전달돼 손상될 수 있고 시술이 2시간 넘게 걸린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식도누공, 폐정맥 협착 등 합병증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지만 폐나 심장이식이 필요해질 수 있어 부담이 컸다. PFA는 주변 조직 손상을 최소화하고 시술 시간을 대폭 줄인 신의료기술이다. 유럽에서는 이미 5~6년 전에 도입됐고 미국 등 전 세계 12만 5000여 명의 환자에게 사용한 결과 부작용 발생률이 0.7%로 보고돼 2~6% 수준인 기존 치료법들보다 안전하다고 평가 받는다.
PFA는 표현 그대로 ‘펄스장’ 에너지를 이용한다. 고에너지 전기 펄스를 이용해 심장에 미세한 천공을 만들기 때문에 주변 조직은 보존하면서 목표로 하는 심근세포만 사멸시킬 수 있다. 심장의 각 조직은 서로 다른 전기장 강도를 갖는다. PFA는 이러한 원리에 착안해 특정 전기장 강도로 타깃 조직만 제거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교대로 양극과 음극 전극을 사용하면 카테터 주변에 양극성 전기장이 형성되어 조직으로 확장되는데, 전기장이 세포막 투과성을 증가시키면 세포기능장애를 유발하고 해당 병소(심근세포)만 사멸시킬 수 있다.
그 결과 시술시간이 기존 방법보다 20~40% 이상 단축될 뿐 아니라 식도, 횡격막 신경 손상 등 부작용도 현저히 줄었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PFA 시술 환자의 87.9%에서 1년 동안 정상 박동이 유지된 것으로 나타났다. 발작성 심방세동 환자의 경우 90.8%가 정상 박동을 유지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정 교수는 “일본·호주·싱가폴 등 아태지역 웬만한 국가에는 PFA가 도입됐다. 3년 전부터 국제학술대회가 PFA 연구로 도배될 정도였다”며 “미국과 유럽 등에서 관련 연구를 경쟁적으로 진행하면서 2030년까지 심방세동 치료의 80%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고 귀띔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작년 9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고 최근에야 보건복지부 신의료기술 평가 결과가 고시됐으니 상대적으로 도입이 늦었던 셈이다.
◇ 누적 환자 8000명 육박…부정맥 치료 선도하는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이날 세브란스병원에서는 권씨 외에도 4명의 심방세동 환자가 오전 중 PFA 시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가장 오래 걸린 환자도 총 시술시간이 3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시술자의 숙련도가 치료 성적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고주파 절제술과 달리, 시술 방법이 표준화되어 보다 효과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시술이 가능하다는 게 PFA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부정맥센터는 1969년 심장박동이 느리게 뛰는 서맥 환자에게 심박동기 삽입시술을 최초로 시행한 이래 국내 부정맥 치료 분야를 선도해 왔다. 1986년에는 부정맥의 정확한 발생 부위를 찾는 전기생리학검사와 비정상적 심장 전기신호가 만들어지는 부위를 고주파 에너지로 치료하는 전극도자절제술을 국내 처음으로 도입했다.
국내 최대 규모인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부정맥 센터는 전담 교수 6명과 심장혈관외과·마취과 등 다양한 진료과의 의료진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환자의 진단부터 치료, 추적 관리까지 전 주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정 교수는 “심방세동도 암처럼 조기발견하고 치료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며 “가장 앞선 심방세동 치료법이 도입된 만큼 더 많은 환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연구 및 치료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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