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의료계가 의대 정원 증원을 두고 1년 가까이 갈등하면서 국민들 중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비율이 70%에 이른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절반 이상은 정부가 현재의 의료개혁 및 의대 정원 증원 등 정책을 고수할 경우 의정갈등 해결 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특히 지난달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을 신뢰하기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의정갈등도 더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은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20~24일 실시한 ‘보건의료 개혁 정책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의정 갈등으로 인해 스트레스나 피로감을 느낀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70%에 달했다. 의정 갈등 장기화가 본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냐는 질문엔 88.0%가 그렇다고 답했고, 이 중 52.4%는 '불안감과 우려 등 심리적 영향'을 받았다고 답했다.
응답자 대다수는 의료개혁 필요성에 동의하면서도 정부가 지난해 2월 제시한 의대 정원 증원 등 정책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의사 인력의 지역과 진료과별 배치 불균형에 대해 87.6%가 심각한 문제라고 답했으며 의사 수에 대해서도 모자란다는 응답이 57.7%로 과반이었다. 정부의 의료개혁 4대 과제에 대한 동의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의료인력 확충(61.0%), 공정보상(63.3%),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69.0%), 지역의료 강화(76.3%) 등 대체로 높은 수준이었다.
다만 올해부터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기로 한 기존 정부안을 두고는 시기와 규모 중 하나만 동의하는 응답자가 34.8%였고 정부안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도 29.0%였다. 정부안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응답은 27.2%에 그쳤다.
응답자 과반인 54.0%는 현 상태로는 의정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고 봤다. 갈등을 해소하려면 전혀 다른 제3의 방안을 내놔야 한다는 응답과 정부가 수정안을 내놔야 한다는 응답이 각각 38.0%, 35.4%로 나타났다. 의정갈등 해소를 위해 의료개혁안을 수정하거나 추진을 보류해야 한다는 응답은 45.4%, 의료개혁을 지속해야 한다는 응답도 37.7%였다. 88.0%는 의정갈등이 해결되지 않을 경우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을 때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는 응답도 75.5%에 달했다.
응답자의 69.6%는 의정 갈등 조정과 해결에 국민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봤다. 다만 일반 국민과 환자는 의정 갈등에서 소외되기 쉽다는 응답이 75.1%, 의정갈등 조정에 일반 국민과 환자는 힘이 없다는 응답도 74.5%에 달했다.
특히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의료개혁에 상당히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컸다. 계엄 사태 이후 보건의료 정책과 관련한 정부의 신뢰 수준이 낮아졌다는 응답은 53.8%로 과반을 차지했다. 또 응답자의 53.5%는 비상계엄 이후 의정갈등이 더 심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계엄사태가 의료개혁, 의사인력 증원 등 정책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응답도 44.7%로 절반에 육박했다.
이태진 서울대 보건대학원장은 “과반의 국민이 의사 수가 부족하며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책 시행 절차나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1년 가까이 지속된 의정갈등 속에서 국민이 경험한 불안감이나 현재의 불확실한 정치적 상황이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의료개혁 동력이 약화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사를 설계한 유명순 교수는 “정책 방향과 목표에 타당성이 있어도 추진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과 그 여파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면 그 정책의 성공 가능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며 “의정 어느 쪽도 정책 결정과 대응에서 국민과 환자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믿음을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는 결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은 다음 달 학계, 정부, 의사단체 등 관계자 등을 초청해 보건의료 정책 집담회를 개최하고 추가 분석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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