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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의 조건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

■임병식 중국 탕산해운대학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 AFP연합뉴스




올해는 한국과 일본 양국에게 뜻깊은 해이다.

1945년 광복(일본은 종전)으로부터 80년,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60년 되는 해이다. 그동안 양국에는 숱한 일이 있었다. 맑은 날과 흐린 날이 교차하듯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지금도 양국 관계는 언제 깨져도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유리그릇이다.

말끔히 정리되지 못한 과거사를 머리에 둔 까닭이다. 특히 피해자로서 한국인에게 과거사는 인화성 높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우리 인식의 기저에는 일본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깊게 깔려 있다. 광복 80년이 흘렀지만 수도 한복판에서 10년째 위안부 소녀상 철야 농성이 이어지고 ‘토착왜구’라는 말이 상대를 제압하는 유용한 기제로 통용되는 게 그렇다.

2023년 1인당 GNI(국내외에서 벌어들인 평균 소득)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일본을 제쳤다. 가구당 순자산과 수출액도 일본을 앞질렀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은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18계단 앞섰다고 발표했다. 문화 분야에서도 K팝을 비롯한 K콘텐츠는 일본을 압도하고 있다. 양국을 오가는 연간 방문객은 1000만 명을 넘어선지 오래됐다. 지구상에 이런 두 나라는 없다. 일본을 찾는 외국인 가운데 한국인은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정부관광국(JNTO)에 따르면 2024년의 경우 11월까지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3338만 명 가운데 한국은 795만 명으로 23.8%를 차지했다.

네 명 가운데 한 명꼴로 한국사람인 것이다. 도쿄와 교토, 오사카, 후쿠오카는 물론이고 일본 소도시까지 우리 젊은이들로 북적일 정도다.

2030세대의 70%는 일본에 호감을 갖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 경제와 문화에서 성과에 바탕을 둔 자신감으로 이해한다. 대한민국은 80년 전, 일제에서 해방된 나약한 한국이 아니다. 예전에 일본이 알던 한국이 아니라는 말이다. 광복 80년은 변화한 위상에 걸맞은, 자신감에 바탕을 둔 대일관계를 세우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에는 여전히 과잉 민족주의가 넘치고, 일본 이슈에는 쉽게 흥분하고 분노한다. 개인 관계에서도 그렇듯 먼저 화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쪽에 허점이 많다. 분노는 냉정해야할 때 눈을 가린다. 한일 양국에는 한일관계를 악용하는 편협한 세력이 있다. 이들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선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 끝에는 끝없는 불신과 적대감이 있다. 청년세대는 당당한데 끝없이 피해의식만 자극한다면 무책임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5년 일본 방문에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하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불행한 역사는 짧고 좋았던 때가 훨씬 길었다”며 전향적인 한일관계를 당부했다.



이후 한류는 일본 열도를 뒤덮었다. 앞서 조선통신사는 200여 년 동안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BTS와 블랙핑클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문화사절단이었다. 하지만 한일관계는 여전히 불안하고 삐걱댄다. 광복 80년, 국교 정상화 60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30년을 맞는 2025년은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기 좋은 해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두 나라는 어쩌면 가장 서로를 모른다. 불행한 과거는 용서하되 잊지 않는 자세를 견지할 때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도 열리리라 믿는다.

한국은 일본과 함께 선진 7개국만 가입하는 ‘5030클럽’ 회원 국가이다. 이 중 제국주의를 경영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국은 여러 지표에서 일본에 앞서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우위도 확보하고 있다. 청년세대는 도덕적 우위와 경제, 문화에서 우위를 토대로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 경제와 민주주의를 리드할 주인공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에 따라 동아시아 질서는 급격한 재편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우리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불행한 과거에 대해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모습을 보일 때 한국은 국제사회의 성숙한 일원으로 거듭날 수 있다.

박철희 주일 대사는 서울대 교수 재임시절 한 토론회에서 “일본 문제는 가만히 있으면서 여론에 편승해 비판만 하는 게 가장 편하다”는 말로 한국 사회의 곤혹스러움을 토로한 바 있다.

비판과 비난이 두려워 침묵하는 사회는 희망도 기대도 없다. 성숙한 토론이 실종된 사회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자각증세 없이 서서히 죽음을 맞는 당뇨병 환자와 같은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미셀 오바마는 “그들이 저급하게 갈 때,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했는데 한일관계에도 적용해볼 만하다. 일본을 도덕적으로 굴복시키는 품위와 관용을 떠올려본다. 일본을 찾는 외국인 4명 가운데 1명은 한국사람인 시대, 일본은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나라이다. 그렇다면 흥분과 분노를 내려놓고 긴 호흡에서 미래에 시선을 둬야 한다.

지난 40여 년 동안 100차례 넘게 일본을 다녔고, 최근 2년 동안은 과거사와 관련된 현장을 집중적으로 다녔다.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 이부스키(指宿)에서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왓카나이(稚內)까지 일본 열도를 종으로 횡으로 오가며 불행한 과거를 직시하는 한편 전후 일본세대가 보여주는 진솔한 움직임을 살폈다.

대학생 자격으로 처음 일본에 발을 디딘 뒤 언론인, 정치인, 대학 교수로 신분이 바뀌었다. 제 시선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뒤따랐다.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는 한계에 갇힌 양국 정치인들의 정치언어를 뛰어넘어 균형을 이야기한다. 참회와 반성의 토대 위에서 군국주의 망령과 싸우고 있는 시민모임은 원천이다. 일본은 종단거리만 2895km(도쿄 경유), 2700km(가나자와 경유)에 달하며 남한 면적 네 배에 달한다. 매주 저와 함께 ‘섬나라 왜놈’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일본과 일본인을 만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모색하길 기대한다.

서경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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