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치 혼란이 가중된 원인 중 하나로 정치권 양극단에서 만들어낸 대안현실(alternative reality)이 지목되고 있다. 한쪽은 일제 잔재 세력이 초월적 권력을 휘두르며 특정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으며 대통령과 정부 기관 주요 관계자가 모두 합리적·이성적 판단 능력이 결여됐다는 대안현실을 믿고 있다. 또 다른 쪽은 친중·종북 세력이 선거 시스템을 장악해 선거 부정이 팽배하고 이로 인해 상대방이 의회 권력을 차지했다는 서사를 믿고 있다. 대안현실론자들의 시각으로는 상대 진영은 협상과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서로의 존재를 완강히 부정해오다 계엄과 탄핵으로 충돌한 것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의 축이다.
한국만이 아니다. 독일과 프랑스, 캐나다도 국가적 리더십 위기에 봉착했다. 세계 각국이 정치 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유가 각국의 국내 문제 탓만은 아닐 것이다. 블룸버그의 한 칼럼니스트는 12·3 계엄 이후 “미국의 가까운 동맹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정치적 혼란에 휩싸인 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라며 “이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의 쇠퇴 때문일 수 있다”고 썼다.
때마침 달러 패권 등 국제 경제 분야 권위자인 배리 아이컨그린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교수와 인터뷰할 기회가 생겨 이 문제에 대해 물어봤다. 그 역시 미국이 세계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이 동맹국 정세에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냉전 이후 오랫동안 중도적 정책을 바탕으로 세계 질서 유지에 방점을 두던 미국의 대외 정책 기조가 약 10년 전부터 자국 이익 추구로 변하면서 동맹국들의 경제와 산업, 외교 환경의 변화도 불가피해졌고 이 과정에서 극단주의자들의 설 자리가 커졌다는 진단이다. 한 나라의 정치·경제 상황이 세계 정세와 동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글로벌 정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한국은 더욱 그렇다.
이런 관점이 맞다면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은 앞으로 4년간 이전보다 커질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세계의 안정이나 미국의 리더십보다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관심이 더 많다. 더욱이 2기 출범을 앞둔 트럼프는 더욱 강경해지고 있다. 그는 최근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사겠다고 공언했다. 파나마 운하의 수수료가 높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운하를 미국에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를 위해 군사력 사용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또 캐나다에는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는 게 어떠냐”고 자극했다. 미국에 경제적 효용이 있다면 상대 국가의 주권도 불가침 영역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신호다.
트럼프의 제국주의 행보는 세계 각국에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린란드를 미국이 편입할 수 있다면 2022년 러시아가 주민 투표를 통해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을 편입한 사건도 정당하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워싱턴포스트는 군사력 사용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발언을 두고 “중국이 대만을 무력 지배하려는 시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수사학”이라고 말했다. 세계 정세는 이전보다 더 불안정하고 대외 변수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외교에 미치는 영향은 더 커질 것이다.
앞으로 더 큰 갈등이 초래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치권은 대안현실에 기반한 싸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근 2025 전미경제학회에서 기자와 만난 정치경제학자 페렌츠 슈츠 스톡홀름대 교수는 “대안현실이 확산할수록 유권자들이 잘못된 정책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며 “경제적 비용은 커지고 신뢰 붕괴로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심화된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정치권과 산업계가 원팀이 돼 트럼프 정책 대응에 힘을 모아야 하는 시기다. 우리가 맞닥뜨린 글로벌 현실은 대안현실보다 더욱 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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