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년(인조 3년) 음력 1월 8일(양력 2월 14일) 함경북도 절도사인 이기빈(李箕賓)이 사망하자 그의 인생을 정리한 ‘졸기(卒記)’가 인조실록에 실렸다. 그런데 그 내용이 부정적인 평가 일색이다. 특히 광해군 시기 제주 목사를 역임하던 시절에 극악무도한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는 기록이 담겼다. “하루는 유구(琉球)국의 왕자(王子)가 보물을 가득 싣고 제주 경내에 정박했는데, 이는 대개 바람 때문에 표류해 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기빈이 판관 문희현과 포위하고 모조리 죽인 뒤 그 재화를 몰수해 들였다”는 것이다.
유구는 오늘날 오키나와에 해당하는 섬나라로 당시 유구는 조선과 함께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 조공을 바치던 나라이자 조선과 오랫동안 교류를 이어오던 나라였다. 그런데 유구의 왕자가 탄 배가 표류해 제주도에 도착했는데, 제주 목사인 이기빈이 재물에 욕심을 내고 유구 왕자를 비롯해 표류민 전원을 살해했다니!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1611년(광해군 3년) 이기빈이 제주 목사 시절에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광해군일기에는 사뭇 다른 기록들이 여럿 있다. 제주에 외국 선박이 표류해 기착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선박이 ‘왜구의 배’라든가 ‘남경 사람과 안남(베트남) 장사치’가 섞인 배라는 기록도 있고 ‘유구의 사신’이 타고 있었다는 전언도 있지만 ‘유구국의 왕자’가 있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하고 14년이 지난 1625년 실록의 이기빈 졸기에 유구 왕자를 살해했다는 내용이 삽입된 것이다. 이것이 ‘유구 왕자 제주 살해설’이라는 소문이다.
이와 관련해 유구 측의 기록에 관련 내용이 전혀 없기에 근거 없는 소문일 가능성이 높은데 어떻게 실록에 기록된 것일까. 만약 단순한 허구적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면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끝나야 하는데, 이 소문은 19세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조선 사회에 유통됐다. 이는 소문과 그 역사적 배경인 제주도가 밀접하게 관련돼 있기 때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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