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로 시작해 희망을 쏘아올렸다'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서울시향 신년 음악회. 첫 곡인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 연주 후 박수 없이 묵념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 곡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장례식 등에서 연주된 바 있는 대표적인 추모곡으로 꼽힌다.묵직하면서도 따뜻한 선율이 티켓을 손에 쥐고 바쁘게 자리에 앉은 관객들에게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할 틈을 마련해줬다. 관객들은 저마다 두꺼운 외투를 잘 정리해 포갠 뒤 두 손을 모았다. 얍 판 츠베덴 서울시향 음악감독은 공연 전 이례적으로 마이크를 잡고 이 같이 말했다.
“2주 전에 발생한 끔찍한 사고의 희생자와 유가족을 추모하기 위해 이 곡을 연주하겠습니다. 연주가 끝난 뒤에는 박수를 자제해 주시고 잠시 묵념하면서 침묵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이날 추모로 시작한 서울시향 신년음악회는 본격적인 공연 이후 ‘희망’을 꺼내 들었다. 첫 작품은 멘델스존 교향곡 4번 ‘이탈리아’로, 츠베덴 감독의 넓은 어깨와 양 팔을 지나 섬세한 손 끝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저마다 여행했던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떠올리게 하는 활기와 역동성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작곡가 멘델스존이 이탈리아 여행 중 본 풍경에서 얻은 영감으로 작곡한 이 곡에서는 이탈리아 특유의 유쾌함과 따사로운 햇살과 역동적인 파도, 풍요로운 포도밭 등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 관객들에게도 전달됐다.특히 1악장과 2악장의 일사분란한 현악의 선율과 이를 뒷받침하며 거침 없이 뻗어나가는 목관 악기들과 금관 악기들의 조화는 빠른 리듬을 추구하는 츠베덴 감독의 손 끝에서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를 만들어내 큰 잔상을 남겼다.
이날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대목은 협연자인 김서현 바이올리니스트의 등장이다. 만 14살의 나이로 2023년 스위스 티보르 버르거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해 클래식씬에 화제를 일으킨 뒤 이제 막 16살이 된 김서현은 반짝이는 은색 드레스에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은 채 군더더기 없이 등장했다.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택한 그는 한 평 남짓의 공간을 사용하면서 2000여석이 넘는 공연장을 압도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특히 1악장의 고음 부문에서 세밀한 스펙트럼까지 선율을 표현하는 능력이 돋보이는 데다 저음으로 이어지는 연결도 매끄럽게 소화해냈다. 무대를 압도할 만한 솔로 연주자로서의 성장할 수 있는 ‘떡잎’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관객들은 김서현의 연주 끝에 엄청난 환호로 응원을 보탰다. 정재왈 신임 서울시향 대표는 “김서현이라는 연주자를 발굴해 서울시향을 통해 많이 알려질 기회를 만든 것처럼 실력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연주자들을 발굴해 무대에 올리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서울시향은 요한 스튜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 서곡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하면서 관객들을 희망으로 들뜨게 했다. 지난해 많은 혼란스러운 일들을 뒤로 하고 잠시 음악으로 다가올 희망에 마음이 부푸는 경험들을 관객들이 나눠가졌다. 서울시향은 이어 오는 16~17일 롯데콘서트홀에서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연주하며 말러 대장정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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