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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 이전에 '금지된 일기장' 있었다 [정혜진의 페어링]

여성의 공간에 대한 메시지 던진

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이전에

잊혀진 소설가이자 혁명가 세스페데스

'금지된 일기장' 70년만에 빛 봐

국내 출간 후 6일 만에 2쇄 돌입



책과 공연을 담당하는 기자로서 어울릴 만한 작품들을 함께 큐레이션해 소개합니다. 5분 투자해서 ‘페어링’의 맛을 즐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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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알바 데 세스페데스 /사진 제공=한길사




한 여성이 매일 같이 런던의 작고 낡은 호텔을 찾는다. 동행자도 없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매일 같이 찾은 프레드 호텔 19호실에서 그녀가 별다르게 하는 일은 없다. 의자에 앉아 있거나 조용히 창밖을 응시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는 편하게 숨을 쉬고 진짜 자신으로 돌아간다.

영국의 위대한 소설가로 꼽히는 도리스 레싱의 단편 소설 ‘19호실로 가다’ 이야기다. 196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이야기는 1963년 출간과 동시에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고 반 세기가 지나도록 여성 서사의 대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성에게도 통제와 검열 속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만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쉬고 나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양팔을 쭉 뻗고 미소를 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 여기서 그녀는 네 아이의 어머니, 매슈의 아내, 파크스 부인과 소피 트라우브의 고용주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중략… 그녀는 존스 부인이고 혼자였다. 그녀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 19호실로 가다(도리스 레싱 지음, 문예출판사 펴냄) 중에서



도리스 레싱 이전에 알바 데 세스페데스가 있었다

레싱 이전에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작가인 알바 데 세스페데스가 있었다. 한때 그가 쓴 장편 소설 ‘금지된 일기장’은 1952년 출간됐지만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인한 두 차례의 투옥 이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게 되면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소설은 2023년 미국에 출판되면서 ‘역주행’의 주인공이 된다. 국내에는 이달 초 한길사가 출간했다. 소설 속에서 ‘나’가 19호실로 택한 대상은 일기장이다.

소설을 따라가 보자. 오랫동안 남편에게 ‘엄마’로 불린 여자가 있다. 가족들은 그녀를 ‘성녀’로 취급하지만 뭔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남편은 자신에게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매달 생활에 보태야 하는 6만 리라 때문에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일기를 쓰면서 차츰 알게 된다. 집안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자신이 비로소 숨 쉴 구멍이 생긴다는 사실을. 자신에게도 검열 없이 생각을 분출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것을. 막연히 가게에서 일기장을 사게 된 것은 우연한 욕망이었지만 사실 일기를 쓰게된 것은 차곡차곡 쌓인 감정이 해석과 분출을 원하고 있었다. 일기를 쓰면서 그는 처음으로 코사티 부인이자 리카르도, 미렐라 엄마에서 발레리아라는 이름을 되찾는다.

내가 나만을 위한 서랍을 가지고 싶다고 하자 남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안에 뭘 넣으려고?”

“그거야 나도 모르지. … 중략 … 아니면 일기장을 넣어놓을 수도 있자. 미렐라처럼.”

일기장이라는 말에 모두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는 미켈레까지도.

“오 여보, 이 나이에 무슨 비밀이 있을 수 있겠어?” - ‘금지된 일기장’ 21쪽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기록하기 시작한 후 발리리아에게는 일기장을 숨기는 게 일이 된다. 하지만 가족들이 이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어느 새 집안일은 모두 발레리아의 몫이 되었기 때문에 빨래 바구니 아래에 넣어도, 침대 시트를 모아둔 서랍장 밑에 넣어도 아무도 이를 발견하지 않는다. ‘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종종 일기를 쓰기 위해 혼자 있고 싶어지거나 간혹 정신이 팔려 있기도 하고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다.

문득 내가 평소에도 항상 지금처럼 주의가 산만하고 가족들 삶에 참견하지 않았더라도 남편과 아이들이 별로 힘들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라 속이 상했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들이 나 없이도 잘 살았을 거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동안 나의 모든 희생이 부질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셈이니까. - 같은 책 224쪽

딸 미렐라가 젊은 변호사 칸토니와 어울리며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일이 잦아진다. 심지어는 대학을 다니면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겠다고 선포한다. (당시는 1950년대이기에 여성이 일을 한다는 것은 부모에게는 피치 못할 이유가 아닌 이상 다소 굴욕적인 일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딸과의 불화를 겪으면서 ‘나’가 깨닫는 것은 미렐라가 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나는 미렐라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몰라서,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애를 바라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다른 엄마들은 느끼는데 나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희망을 자식에게 투영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엄마들은 자기와는 다른 삶에 자신의 삶과 희망을 투영하고 싶어 했다. - 같은 책, 250쪽



어느 날 ‘나’에게도 사건이 벌어진다. 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토요일에 사무실을 찾았는데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해 회사를 찾은 사장 귀도와 마주하게 된다. 사장 귀도에게서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을 대하는 무언가를 느낀다. 이 역시 일기장에 복기를 하지 않았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일이다. 그때부터 ‘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가벼워지고 뭔가 외모가 젊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베니스로 귀도와 밀월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베니스는 ‘나’와 남편 미켈레의 신혼여행지지만 가난한 생활이 뒤따라오는 미켈레와는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뚜렷해진다.

그가 그림을 그리듯 내 이니셜을 손가락으로 훑었고, 우리는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이니셜을 훑는 그의 손동작은 기억한다. 마치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순간 몸이 떨렸다. 그의 손이 내 몸을 만지는 것 같았다. 내 피부를 어루만지는 것만 같았다. …중략… 그는 낮은 목소리로, 글씨를 읽듯이 “발레리아”라고 했다. - 같은 책 252쪽

여행의 달콤함을 꿈꿀 때쯤 자기 삶을 찾겠다며 자신을 멀리하던 아들 리카르도가 예상치 못하게 ‘나’의 발목을 잡는다. 대책 없이 아이를 가진 뒤 결혼을 하겠다고 선포한 것. 나아가 아이를 ‘나’에게 맡기고 자신은 부인과 ‘기회의 땅’ 아르헨티나로 가서 도전을 꿈꾼다. 나에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만 남았다.

어머니는 언제나 미렐라가 나를 닮았다고 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다른 시대에 태어났으면 나도 미렐라처럼 자신감 넘치는 여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자신감 때문에 미렐라가 함정에 빠질까 두려웠다. - 같은 책 377쪽

쓰는 여성에게 달라지는 것

2024년 12월 마지막날 프랑스 마르세유의 한 병원에서 한 여성이'여성을 향한 폭력을 멈춰주세요'라는 내용의 포스터를 응시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금지된 일기장’의 ‘나’를 짓누르는 감정은 죄의식과 피로감이다. ‘희생’이라는 단어 속에 자신의 삶을 헌신하던 그는 어느 순간 모든 자신의 행위들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간은 고민의 여지 없이 지나치던 감정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힘을 얻는다. 그간 목도하지 않았던 진실도 본다.

오늘 저녁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삶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기를 쓰며 오랜 사유를 통해 얻은 경험을 포함한) 내 모든 경험은 삶이란 결국 결론을 내리려는 절박한 노력과 실패의 반복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적어도 내 삶은 그랬다. 411쪽.

결국 귀도에게 헤어지자고 말한 뒤 발레리아가 선택한 것은 일기장을 태우는 일이다. 6개월 간의 모든 세밀한 감정 변화를 기록한 노트이자 자신의 인생의 한 대목이 사라지게 될 큰 결심이다. 과연 ‘나’는 일기장을 태운 뒤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이제 인정할 경우 퍼져갈 불안이 두려워 막연히 회피하지는 않는다는 것. 발레리아는 마흔셋에 이르러 삶을 다시 살 수 있게 됐다.

일기 속 내 모습이 더 진실했는지, 아니면 나를 초상화처럼 아름답게 남길 수 있도록 굴던 행동에서 더 진실했는지 자문해본다. 잘 모르겠다. 정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같은 책 429쪽

이 일기는 ‘나’의 시각에서만 서술되지만 그의 감정 변화를 타고 400쪽이 넘는 분량을 함께 동행하는 느낌이 ‘훔쳐보는 일기장’의 야릇한 죄의식을 넘어 큰 즐거움을 준다. 일기로 내면을 공개하는 소설을 택한 것은 고도의 장치로도 해석된다. 70여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세대 갈등과 모성애를 둘러싼 혼란, 권태로움은 여전히 통하는 부분이 많다. 앞으로 여성들의 자기 서사를 다룬 작품들이 더욱 많아질 조짐이 보이는 부분이다. 출간 6일 만에 2쇄를 찍게 된 이 책이 여성 서사에 대한 수요 또한 높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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