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과 델릴라의 사랑 이야기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다. 이 서사를 꿰뚫는 핵심 코드는 탐욕과 배신이다. 헤라클레스에 버금가는 막강한 힘의 소유자인 삼손은 자신의 맹목적인 사랑과 탐욕에 빠진 연인의 배신으로 인해 몰락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스스로 파멸의 길에 오른 삼손의 기구한 운명은 수 세기 동안 서구 예술 작품의 주요한 소재로 활용됐다. 그중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소장돼 있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삼손과 델릴라’는 화려한 색채 미학과 풍성한 표면의 질감을 강조하는 화풍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1609년 앤트워프의 부유한 미술 애호가 니콜라스 로콕스의 주문으로 제작된 이 그림은 삼손의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화면 중앙에 위치한 육중한 몸체의 삼손은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관능적인 델릴라의 무릎에 기대어 있는 그의 수동적인 자세는 근육질의 단단한 신체와 대비를 이루며 두 인물들 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잠든 삼손의 머리카락이 모두 잘려나가면 그는 문밖에 대기하고 있는 군인들에 의해 제압돼 두 눈이 뽑히는 참혹한 형벌을 받게 된다. 어두운 방안을 밝히며 타들어가는 촛불은 얼마 남지 않은 삼손의 시간을 상징한다.
구약성서 판관기(사사기)에 의하면 자신의 죄를 뉘우친 삼손은 신으로부터 마지막 힘을 부여받아 이교도의 성전을 무너뜨리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 종교적 서사에서 루벤스는 삼손의 순교자적 모습보다는 인간적 나약함에 주목했다. 작가의 의도는 과도한 욕망과 지나친 자기 확신이 비극적 최후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와 더불어 상반신을 노출하고 있는 델릴라의 관능적인 모습과 그 뒤에 서 있는 추악한 노파의 실루엣이 중첩되는 장면은 델릴라의 미래를 예견해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된다. 촛불을 통해 빛과 어둠이 극적 대비를 이루고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붉은 기운의 색채가 화면을 지배하는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17세기 바로크 화풍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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