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취임 이후 익숙한 광경이 다시 펼쳐지고 있다. 바로 북미 정상 간의 밀당(밀고 당기기)이다. 지난 2017년 트럼프 1기 당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2번의 정상회담(싱가포르·하노이)과 1번의 깜짝 만남(판문점 회동)을 성사시킨 바로 그 애증의 관계 말이다.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로 이 기묘한 관계는 역사책에나 기록될 뻔 했지만 ‘트럼프의 귀환’이 외교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놓고 있다.
6년 전 하노이에서 체면을 구길대로 구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다시 손을 내민 것은 트럼프 쪽이다. 대선 유세 기간에 김정은과의 친분을 수차례 언급한 것은 트럼프 특유의 ‘자기 과시용’이라 해도 취임 후 “김정은은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다”라고 부른 것은 단순한 말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김정은과 다시 연락을 취해보겠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할 것”(I will)이라고도 답했다.
‘뉴클리어 파워’는 공식, 비공식 핵보유국을 통칭하는 말이다. 핵무기를 보유해도 제재를 받지 않은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 등이 비공식 핵보유국이다. 이에 앞서 트럼프가 발탁한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지명자도 같은 표현을 썼다. 김정은이 그토록 갈망해온 ‘제재를 받지 않는 핵보유국’이라는 당근을 트럼프 2기 정부가 줄 수 있다는 강한 유혹처럼 들린다.
미 안보 전문가들은 “이 표현에 아직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면서도 트럼프와 그의 안보팀이 지난 8년 간 북한의 핵 능력을 주시했다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진단한다. 트럼프의 머릿 속에는 이미 50개 핵탄두를 보유한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각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겉으로 듣기에는 그럴듯한 오바마·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기간 동안 북한의 핵 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북한은 일단 표면적으로 트럼프의 ‘당기기’에 ‘밀어내기’로 응수하는 모습이다. 북한은 26일 전략순항미사일 시험발사 사실을 공개하고, 트럼프 취임 후 첫 대미 비난 담화를 발표했다. 북한은 한미간의 연합 훈련을 거론하면서 “미국이 주권과 안전이익을 거부하는 이상 철두철미 초강경으로 대응하는 것만이 미국을 상대하는 최상의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북한 전문가들은 이를 북한 특유의 ‘기싸움’으로 해석하면서 김정은이 트럼프의 반응을 본격적으로 떠보기 시작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처럼 북핵을 둘러싼 외교전이 다시 달궈지고 있지만 북한과 미국을 둘러싼 글로벌 정세는 8년 전과는 매우 다르다는 분석도 상당하다. 트럼프의 적극적 구애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입장에서는 이미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북미 대화를 다시 시작할 유인이 크게 줄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밀착된 북러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8년 전과 달리 북한은 경제·군사적인 원조를 받으며 현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우군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에 파병된 북한군 중 약 1,000명이 사망했다’는 최근 영국 BBC의 보도는 현재와 미래의 북러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북러는 이제 단순한 동맹을 넘어 ‘혈맹’의 관계로 발전했다. 이는 북한이 우리와 전쟁을 벌이면 러시아가 자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수세에 몰린 러시아의 절박함으로 인해 북한은 강력한 ‘생존의 카드’를 거머 쥐었다. 더구나 북한 입장에서 러시아는 미국처럼 정치적 리스크가 크지 않은 국가다. 전쟁으로 인해 인기가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은 여전히 절대 군주로 군림하고 있으며 장기 집권의 가능성이 높다.
반면 트럼프는 취임 초반 글로벌 정세를 쥐고 흔들고 있으나 그에게 남은 시간은 4년 뿐이다. 더구나 2년 후 중간선거가 열려 의회 권력을 민주당에게 빼앗기게 되면 아무리 트럼프라 해도 급속한 레임덕을 맞을 수 밖에 없다. 트럼프가 취임 첫날부터 외교·경제 전반에서 파상적인 속도전을 펼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는 ‘미국을 완전히 개조하고 싶다’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8년 전과 달리 중동 분쟁, 우크라 전쟁 등 트럼프가 당장 풀어야 할 외교 현안도 산적해 있다.
결국 김정은 입장에서는 계산기를 더 철저히 두드려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한반도 외교 지형으로 보인다.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서 경제 제재를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긴 하지만, 그 실낱 같은 가능성을 믿고 트럼프에게 다시 올인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반면 러시아와의 관계를 끈끈이 하고, 중국의 체면도 적당히 세워주면서 북중러 연대를 공고히 하는 것은 보다 현실적인 김정은의 선택이 될 수 있다. 한반도의 운명을 둘러싸고 트럼프와 김정은, 푸틴의 숨막히는 두뇌 싸움이 시작됐다. 불행히도 당사자인 우리의 외교적 존재감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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