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대북제재를 비웃기라도 하듯 무역코드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스페인에서 핵무기 제조용 장비를 들여온 것으로 나타났다. 경유국으로 거론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중국 정부는 의혹을 부인하며 “수출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28일 미국 싱크탱크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의 ‘여러 국가를 거쳐 북한에 반입된 진공로:HS 코드 사례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께 스페인에서 선적된 ‘겸용 진공 전기로(진공로)’는 멕시코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 진공로는 핵무기 제조를 위해 금속 우라늄을 녹이는(용융) 작업에 이용된다. 이 때문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 장비의 북한 수출을 금지했는데 제재가 무력화한 셈이다.
이 진공로의 최초 공급자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스페인 무역업자의 선적 때부터 존재가 확인된다. 이때 수출입에 사용되는 ‘HS 코드’는 문제가 없었다. 진공로는 멕시코로 간 뒤 다시 남아공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무역 서류의 HS 코드와 설명이 단순 ‘기계류’로 바뀐다. 멕시코 내 수령자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진공로의 HS 코드와 설명은 관세가 면제되는 ‘금속 폐기물’로 다시 한 번 둔갑해 중국에 수출됐고 이후 북한으로 건너갔다. 보고서는 멕시코나 남아공의 수출입 데이터 전산 시스템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HS 코드 위조가 이뤄졌고 바로 파악도 못했다는 것이다.
ISIS 창립자이자 이번 보고서를 작성한 데이비드 올브라이트는 미국 북한 전문 매체 ‘NK뉴스’에 북한이 제재를 피해 핵무기 제조에 필수적인 장비를 구하는 데 엄청난 자원을 투입해 계획을 짜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멕시코와 남아공은 서방 측 정보기관들로부터 제때 제보를 받지 못해 진공로가 중국으로 선적되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남아공과 중국 정부는 미국의소리(VOA)에 북한의 핵무기 제조 필수 장비를 불법 수입하는 데 연루됐다는 의혹을 부인했다.
크리스핀 피어리 남아공 외무부 대변인은 VOA에 “통제의 이행과 집행의 효과는 국가 간 정보 공유를 포함한 잠재적 위반에 대한 적절한 위험 분석과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달려 있다”며 “해당 사례 연구에서 언급된 사건에 대해 통보 받은 바 없으며, 어떠한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피어리 대변인은 “주요 국제 조약과 협약의 당사국이자 유엔 회원국인 남아공은 비확산 관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를 포함한 모든 국제적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무기 프로그램과 관련한 물질, 장비, 기술 전용을 막기 위해 전 세계 국가들과 다자 체제 내에서 지속적으로 협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진공로가 북한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경유지로 지목된 중국도 대북 제재와 관련한 기존 입장만 재강조했다. 류펑위 주미 중국대사관 대변인은 VOA에 “구체적인 상황을 인지하고 있지 않다”며 “중국은 수출 통제 법규와 국제 의무에 따라 이중용도 물품을 항상 엄격히 통제해왔다”고 선을 그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