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 하면 어둡고 음침한 냄새를 풍긴다. 사전적 정의로 정경유착은 정치와 경제가 밀착된 현상을 의미한다. 현실에서는 정치인과 기업인의 이해가 얽혀 야합하는 부도덕한 밀착관계를 지칭한다. 정경유착의 장면을 연상하면 밀실에서 권력자와 재력가가 은밀히 만나 돈 봉투를 주고받거나 지하주차장에서 차 트렁크에 돈다발이 든 사과박스를 옮기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과거 개발독재 시대에 정치인은 기업인에게 경제적 이권을 부여하고 그 반대급부로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지금은 정치인과 기업인의 은밀한 금전 거래는 불법이다. 정치인이 직접 기업인에게서 돈을 수수하면 부정부패로 형사처벌된다. 심지어 본인이 아니고 가까운 지인이 금품을 받거나 이득을 취해도 경제공동체라는 죄목으로 처벌 대상이 된다.
당연히 정경유착은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낙후된 관행이라 여겨진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전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아니다. 우리보다 더 노골적이다.
미국의 기업인들은 대선 후보 캠프에 엄청난 금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한다. 경제잡지 ‘포브스’(Forbes)는 지난 미국 제47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와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후보에 기부한 억만장자(순자산 10억 달러 이상)가 각각 81명, 52명이라고 조사했다.
블룸버그 기준 세계 부호 1위인 테슬라의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는 트럼프 캠프에 1억3000만 달러(약 1800억원)를 기부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대표적 억만장자인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 빌 게이츠는 해리스 캠프에 5000만달러(약 700억원)를 후원했다.
일론 머스크는 정치자금 지원을 넘어 러닝메이트처럼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머스크는 트럼프와 함께 미국 전역에 유세를 다니며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경합주의 보수 유권자 등록을 장려하기 위해 100만 달러의 ‘복권 행사’까지 주최해 법적 소송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축하행사에서 춤까지 추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정부효율부 수장으로 지명되어 실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대기업 회장이 일론 머스크처럼 특정 후보를 전폭 지원하며 대통령 선거판에 뛰어들었다가는 뼈도 못 추렸을 것이다. 정당의 비난 성명, 국회 청문회 소환, 언론의 비판. 시민단체의 반대시위가 폭풍처럼 몰아쳤을 것이다. 다른 대선 후보의 지지자들이 불매운동을 벌이고 노조도 파업을 선언해 기업이 거덜 났을 것이 분명하다.
기업인이 살짝 정치에 관한 의견만 표명해도 욕을 바가지로 먹는다. SNS 활동을 활발히 하여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렸던 어느 젊은 재벌 경영자는 정치적 성향의 글을 올렸다가 거센 비난 공세에 시달려 SNS를 끊었다. 국가 대표급의 유명 원로 가수는 작년 12월 은퇴 공연에서 오른팔과 왼팔에 비유하며 이념적 대립을 비판하는 발언을 한 것이 시대정신에 어긋난 양비론으로 맹공격을 받아 곤욕을 치렀다. 기업인이나 연예인은 사회적 공인으로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정서가 강하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일론 머스크의 정치 참여에 관해 별 반응이 없다. 머스크 때문에 가장 피해를 본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카멀라 헤리스가 공개적으로 머스크의 트럼프 지지를 비난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공화당은 머스크가 불법으로 선거에 개입했다고 검찰에 고발하지도 않았다. 테슬라 본사 앞은 조용하고 테슬라의 전기차는 거부감없이 잘만 팔린다.
머스크에 대한 언론의 비판적 기사는 대선 개입보다 극우적 발언과 행동에 초점을 둔다.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취임식 축하 집회에서 무대에 올라온 머스크는 연설 도중에 팔을 곧게 뻗어 ‘파시스트 경례’를 연상시키는 손동작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독일에서는 한 달 내로 다가온 독일 총선에서 머스크가 극우 독일대안당(AID)에 대한 지지성명을 공개한 것에 반발해 테슬라 전기차를 구매하지 않겠다는 소비자들이 등장했다. 미국에서도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해 X(엑스)로 사명을 변경할 때 트위터 충성파들이 테슬라 전기차 불매운동을 벌였다.
일론 머스크는 워낙 돌출적으로 행동해 여론을 몰고 다닌다. 남의 이목이나 사회 통념을 무시하는 개인적 성향 때문에 욕을 먹지만 대통령 선거 참여로 비난받지는 않는다. 빌 게이츠가 머스크는 똑똑한 사람이지만 정치 개입은 비정상이라고 쓴소리한 정도가 두드러진 비판이다.
일론 머스크는 원래 민주당 지지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성전환 수술을 받은 것에 충격을 받고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민주당을 버리고 공화당으로 돌아서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일론 머스크는 이념, 권력, 이권 모두를 다 챙겼다. 기업인이 이렇게 정치에 올인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고서도 기업이 잘 돌아가는지 의문이다. 다음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하면 보복당하지 않을까 불안하지도 않은지 궁금하다.
미국인들은 기업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개인적 선택이며 권리라고 인정해 주는 것 같다. 기업인의 정치 참여와 경영 활동을 분리해 접근한다. 기업인도 다른 유권자처럼 게임의 규칙을 지키며 선거에 참여하면 별 문제없다고 간주한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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