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하게 오래 전 일 같지만 불과 3년여 전의 일이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 후보는 “지나치게 이념에 집착하는 것에 반대한다”면서 “이념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국민의 삶”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후보 윤석열’과 ‘대통령 윤석열’의 말은 달랐다. 집권 2년 차가 되자 윤 대통령은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이라면서 “분명한 철학과 방향성 없이 실용은 없다”고 말을 바꿨다. 이념에 사로잡힌 대통령은 이듬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토록 중하다는 이념이 시종일관 외치던 ‘자유민주주의’이겠거니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싶다. 국민의 삶은 엉망이 됐다.
“여인은 돌아서지 않습니다(The lady’s not for turning).” 집권 초 윤 대통령의 개혁 롤모델로 자주 언급되던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보수 정치의 ‘전설’이 된 것은 1980년 보수당 대회에서의 이 한마디 연설 때문일 것이다. 실업자 200만 명이 넘는 혹독한 경기 침체에도 경제 자유화 신념과 긴축·민영화 정책을 관철시키겠다는 이 선언은 ‘대처리즘’의 표어처럼 회자된다. 무책임한 말 바꾸기와 변심이 난무하는 정치권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일관성은 대처 전 총리의 큰 무기였다.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꾸며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지 않는 정치인은 신뢰를 얻기 힘들다. 미국에서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는 정치인은 ‘플립 플로퍼(flip-flopper)’라는 조롱 섞인 꼬리표가 달려 정치 인생의 발목을 잡히곤 했다. 2004년 미국 대선에서 존 케리 민주당 후보가 표심을 의식해 이라크 전쟁·교육 등에 관해 상원의원 시절의 표결과 다른 입장을 보였다가 ‘플립 플로퍼’로 낙인 찍혀 고배를 마신 것이 대표적이다.
물론 모든 정치인이 대처 전 총리와 같을 수는 없다. 외부 여건이나 상황이 바뀌면 입장 변화가 불가피해질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달라지거나 뒤늦게 깨달은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아야 할 때도 있다. 모두가 한 번 뱉은 말에 얽매인다면 협상과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필수 과정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자신이 뱉은 말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는 오히려 사회 발전을 저해하거나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 제도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1860년 대선 캠페인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면, 1940년 자신이 재선되면 미국이 외국과의 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언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이듬해 자신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세계는 어떤 모습이 됐을까.
대의와 국가이익이라는 대원칙을 전제로 한 깊은 고민과 진정성, 유권자에 대한 설득과 실천의 과정을 거칠 때 정치인의 ‘변심’은 정당화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노선 전환이 정치인으로서의 성장과 진화로 받아들여질지, 눈앞의 이익을 노린 ‘얄팍한 수’로 폄하될지 여기에 달렸다.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실용주의’를 선언하고 정치적 변신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는 “이념과 진영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면서 “기업이 앞장서고 국가가 뒷받침해 다시 성장의 길을 열어야 한다”고 윤 정부와 같은 ‘민간 주도 성장’ 기조를 내세웠다. 이어 전 국민 25만 원 민생회복 지원금 포기, 기본소득 재검토 방안까지 거론하고 있다. 3일 반도체특별법 정책 토론회에서는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에 반대하는 노동계를 의식한 듯 “예외적으로 몰아서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왜 안 되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실용주의 선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윤 대통령이 ‘이념보다 국민 삶’을 외치던 2022년 대선 당시 이 대표도 실용주의와 경제성장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功)을 띄우며 ‘투자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던 그는 거대 야당을 이끌며 줄곧 경제 살리기 입법을 훼방 놓고 노란봉투법·상법 개정안·국회증언감정법 등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 법안들을 밀어붙였다.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며 총선 공약도 내팽개친 그가 아닌가. 숱한 말 바꾸기로 정치적 유불리만 생각한다고 국민들의 뇌리에 박힌 불신의 뿌리는 깊다. 조기 대선이 예상되는 타이밍에 돌변한 이 대표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당과 지지 세력에 대한 설득과 조속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이 대표가 또다시 ‘플립 플로퍼’가 될지, ‘정치적 진화’에 성공할지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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