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직후 CNN은 트럼프의 가장 큰 정적은 민주당도, 중국도 아닌 미국 국채시장이라고 진단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바라보는 월가의 인식을 보여준 평가다. 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을 잘못된 방식으로 추진하면 국채금리는 치솟기 마련이다.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이 새삼 주목 받는 이유다. 2022년 영국이 고물가에 시름하는 와중에 리즈 트러스 신임 총리가 경기 부양책을 들고 나오자 채권 자경단이 시장을 들쑤셨다. 고금리의 맹폭에 시장이 휘청이며 금융 위기 그림자마저 드리우자 트러스 총리는 취임 한 달여 만에 퇴임했다. 트러스 총리의 몰락을 트럼프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물가를 자극할 수 있는 관세를 마구잡이로 남발하다가 실패한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국채금리를 올리지 않기 위해 신경 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은 “트럼프와 나는 기준금리가 아닌 장기금리를 보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 대한 개입 욕구를 누르고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미국 내 에너지 생산을 강조하는 “드릴, 베이비, 드릴” 발언은 인플레이션 기대를 가라앉히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취임 이후 연일 쏟아내는 관세 발언도 실상은 예고를 위한 ‘포워드 가이던스’에 가깝다는 평가다. 미리 예고한 뒤 발표하고 실제 시행은 시차를 두는 패턴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취임과 동시에 10% 보편관세와 60% 대중 관세를 예고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각국으로부터 동시다발적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있는 보편관세 대신 일대일 맞춤형 상호 관세를 내세우고 있다. 이 모든 행보에는 한 가지 목적이 담겨 있다. 절대로 시장을 놀래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최근 시장도 트럼프의 이러한 전략을 이해하는 분위기다. 취임 직전 4.8% 수준에 근접했던 미국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현재 4.48%까지 내려왔다. 프리야 미스라 JP모건자산관리 매니저는 “투자자들은 시장이 밀릴 경우 대통령이 관세정책을 유동적으로 조정할 것이라는 이른바 ‘트럼프 풋’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효과를 확인한 트럼프는 앞으로 관세에 있어 지금과 같은 ‘명목적 강공, 실질적 신중’ 전략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관세 부과가 현실화한 현 시점부터는 물가지표 관리가 중점 점검 대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관세 영향에 따른 물가 상승세가 일시에 몰린다면 시장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2월 중국 관세는 부과하면서 멕시코와 캐나다 관세는 미뤘다. 물가 영향이 3~4월 지표에 몰리지 않도록 분산하려는 시도가 읽힌다. 이를 고려하면 4월 이후 예정된 각국 상호 관세도 무역적자 규모가 큰 상대국부터 순차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길고 험난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관세 카드를 내려놓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한다. 관세를 협상 수단이자 무역적자 감소, 재정 수입 확대, 제조업 활성화 수단으로 보는 까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국가별 관세 외에도 철강·자동차·반도체 등 품목별 관세도 별도로 예고하고 있다. 외신들은 벌써 의약품 등 신규 품목 관세 가능성도 거론하고 있다.
트럼프와의 관세 협상을 일시적 이벤트가 아닌 시장과 물가에 따라 속도와 강도가 조정되는 장기 협상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어쩌면 4년 내내 새로운 이슈와 요구에 대응해야 할 수 있다. 불확실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면 트럼프 임기 초반에 결정될 문제는 아닐 수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대통령 공백으로 한미 정상 간 만남이 기약 없이 미뤄지고는 있지만 우리 정부와 기업이 대응할 기회와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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