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산업은 한국 경제를 견인하는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수출액이 1419억 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20.8%를 차지할 정도다. 반도체 회사가 치열한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고 초격차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이 언제든지 필요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하는데 한국의 주 52시간 근로 규제는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참 연구개발을 하다가 정시에 퇴근하는 삼성전자 근로자와 달리 대만 TSMC에서는 노사가 합의하면 근무시간을 하루 8시간에서 12시간까지 늘릴 수 있고 연구개발부서는 이를 2교대로 운용해 24시간 중단 없이 일할 수 있다. 미국의 엔비디아에서는 근로시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설계가 진행된다.
한국의 근로기준법에 해당하는 미국의 공정근로기준법에는 초과근로시간에 대해 급여를 50% 할증해 지급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그러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근로시간 자체를 제한하는 조항은 없다. 더욱이 미국의 근로자는 초과근로시간에 대한 급여를 받을 수 없는 자(면제 근로자)와 받을 수 있는 자로 구분된다. 면제 근로자는 연봉 3만 5568달러 이상을 봉급 베이스로 받는 경영·전문·관리적 직무 수행자거나 연봉 10만 7432달러 이상을 받는 비육체적 근로자다. 봉급 베이스로 받는 근로자의 대표적인 특징은 결근해도 급여가 줄지 않는 것이다. 면제 근로자의 고용계약서에는 연봉과 더불어 면제(exempt)라고 기재된다. 한 연구에 의하면 한국에서 관리·사무직과 기타 직종에서 연봉 상위 25%를 면제 근로자로 상정하면 연평균 근로시간이 138시간 감소하는 것으로 추정돼 저녁이 있는 워라벨의 삶이 실현될 가능성을 높인다.
여러 국회의원들이 제안한 반도체 특별법안들 중에서 국민의힘 이철규·박수영 의원의 법안이 반도체 연구개발에 종사하는 근로자를 주 52시간 근로 규제 적용에서 제외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의원 안은 당사자 간 서면 합의를 통해 적용에서 제외되며 박 의원 안은 근로소득 상위 5%만 적용에서 제외되는 등 실제로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반도체 연구개발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초과근로급여 면제와 같은 파격적인 제도를 반도체 연구개발 종사자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미국의 공정근로기준법에는 해고와 관련된 조항이 없으며 노사 간의 권리·의무를 규정하는 기본법은 관습법이다. 근로자가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사직할 수 있다면 사용자도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다는 것이 노사 간의 동등한 입장인데 이것을 ‘임의 고용 원칙’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지만 이런 방향에서 근로시간을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사용자가 면제 근로자 업무를 채용 공고하고 지원자들 중에서 채용하면 주 52시간 근로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유력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반도체 연구개발 종사자에게만 면제 제도를 적용하면 특정 산업에만 특혜를 주는 것으로 비춰지는 등 법적 공정성에 어긋날 수 있으므로 모든 산업에 면제 제도를 적용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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