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방위산업 기업들의 몸값이 크게 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유럽연합(EU)에 방위비 지출 확대를 압박하면서 EU 국가들이 국방 예산과 관련 투자를 늘릴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진 까닭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을 서두르면서 EU가 자체적으로 평화유지군을 창설하려는 움직임도 유럽 방산주 몸값이 오르는 원인으로 꼽힌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마켓워치 등에 따르면 17일(현지 시간) 유럽 증시에서 스웨덴 방산 업체 사브가 16.17% 올랐고 △독일 라인메탈(14.03) △영국 BAE시스템스(8.96%) △이탈리아 레오나르도(8.14%) △프랑스 탈레스(7.83%) 등의 주가도 일제히 상승했다. 방산 업체 주가를 추종하는 ‘스톡스 유럽 토털마켓 항공우주·방산)’ 지수는 이날 2006.05를 기록해 지난해 말(1704.65) 대비 18% 뛰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직전인 2021년 12월 말(824.45)과 비교하면 상승 폭은 143%를 넘는다. 범유럽지수인 스톡스유럽600지수는 방산주의 상승에 힘입어 555.42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외신들은 유럽 방산주가 ‘트럼프 랠리’를 펼쳤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행정부 당시부터 EU 상당수 국가가 회원국으로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방위비를 자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점을 계속 문제 삼아왔다. 최근에는 EU 국가들이 방위비 지출 규모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5%까지 늘려야 한다고 압박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영국·독일·프랑스 등 주요국들이 방위비로 GDP 대비 2% 안팎(2023년 기준)을 쓰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EU가 방위비 증액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최근 나토의 방위비 지출 목표치가 GDP의 3%를 훨씬 넘게 될 것이라고 밝혔고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방위비 증액 목표를 GDP 대비 2.5%로 잡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서 EU를 배제하려고 하자 EU가 우크라이나 방어 목적으로 평화유지군을 창설하려고 시도하는 것도 방산주에 호재다. 유럽 매체들은 이날 EU 주요국 정상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한 긴급 회동에서 방위비 증액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전했다.
방위비 증액은 EU뿐 아니라 미국 방산주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록히드마틴과 노스럽그러먼 등 미국의 대형 군수 업체들은 방위비 확대에 따라 잉여 현금이 두둑해지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버티컬리서치파트너스에 따르면 글로벌 방산 기업 15개의 잉여현금흐름(FCF)은 연초 500억 달러(약 72조 원)로 2021년 전보다 두 배가량 증가했다. FT는 미국 방산 업계가 늘어난 현금으로 인수합병(M&A) 등 공격적인 투자에 나설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테크 업계는 인공지능(AI) 기술을 고리로 방산 업체와 협력 범위를 넓히고 있다. 생성형 AI 챗GPT를 개발한 오픈AI는 지난해 12월 미국의 방산 업체 안두릴과 드론 공격을 미리 감지해 방어하는 시스템을 공동으로 구축하기로 했다. 오픈AI의 라이벌로 꼽히는 AI 스타트업 앤스로픽은 미군에 AI 알고리즘을 제공하고 있다.
다만 방위비 지출이 EU 각국의 재정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실제로 이날 독일의 국채 10년물 수익률은 방위비 증액을 위해 독일 정부가 국채를 더 많이 발행할 것이라는 전망에 최근 2주 내 최고치로 오르기도 했다. 국채 수익률은 가격이 떨어지면 반대로 오른다.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글로벌은 방위비를 GDP 대비 5%로 늘렸을 때 EU 국가들이 추가로 부담해야 할 재정지출 규모가 연간 8750억 달러(약 1263조 원)라고 추산했다. 그러면서 “다른 지출 감소로 상쇄하거나 신용도에 부담을 주지 않고는 개별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을 훨씬 넘는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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