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나이퍼(저격수)를 주제로 다룬 영화를 보면 종종 화면 속에서 저격수를 찾을 수 없다. 총을 발사한 저격수가 움직인 후에야 비로소 그가 그곳에 있었음을 알아챈다. 저격수는 숲속, 눈밭, 가시덤불, 사막 등 주변 주위 환경에 그대로 녹아들어 자신을 숨긴다.
골프코스에도 위장술은 사용된다. 그 위장술의 대가였던 앨리스터 매켄지(1870~1934)에 관한 이야기다. 매켄지는 미국의 오거스타내셔널과 사이프러스 포인트, 호주의 로열 멜버른, 아일랜드의 라힌치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스를 만든 설계가다. 그는 현대 골프코스 설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매켄지는 잉글랜드 리즈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은 스코틀랜드 혈통이었다. 평소 킬트를 자주 입었던 걸로 미뤄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매켄지는 원래 외과의사로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 기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영국군 의무관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당시 매켄지는 자연적인 엄폐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보어족의 위장술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 시기가 그의 인생 전환점이 된 것은 물론 설계 철학에 영감을 얻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 됐다.
매켄지가 골프코스 설계를 처음 한 건 1907년이다. 리즈 북쪽에 있던 앨우들리 골프클럽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면서 코스 레이아웃을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클럽 위원회는 매켄지의 레이아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 당시 코스 설계가로 명성이 자자하던 해리 콜트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했다. 콜트는 매켄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눈 끝에 매켄지의 아이디어가 자신의 생각을 좀 더 확장한 것임을 깨닫고 그를 지지했다.
매켄지는 1914년에는 영국 잡지 컨트리라이프가 주최한 골프 홀 디자인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 대회의 후원자가 미국의 유명 코스 설계가이자 미국골프협회(USGA) 창립을 주도했던 찰스 블레어 맥도널드였다. 매켄지는 이 우승을 계기로 미국에도 연줄이 닿게 됐다.
매켄지는 보어족의 위장술을 코스 설계에 적극 반영했다. 그는 “군사적인 위장술과 골프코스의 위장 사이에는 유사점이 많다”며 “코스 설계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하는 것이고, 그의 작품이 자연 자체와 구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코스 디자인의 13가지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코스 설계의 바이블로 여겨지고 있다.
매켄지는 ‘골프의 고향’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1915년에는 올드 코스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했고, 1924년에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올드 코스 맵을 제작했다. 그의 사후에 원고가 발견돼 1995년 발간된 책의 제목도 ‘세인트앤드루스의 정신’이다.
매켄지의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지는 사이프러스 포인트 골프클럽이 개장한 건 1928년이다. 이 코스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반도 끝의 사이프러스 숲과 태평양을 배경으로 한 장엄한 풍광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매켄지가 이곳을 디자인하게 된 데에는 약간의 행운(?)도 따랐다. 원래 다른 설계가가 디자인을 하기로 돼 있었으나 그가 사망하는 바람에 매켄지가 맡게 된 것이다.
매켄지의 탁월함은 그가 사이프러스 포인트의 수려한 경관만을 이용한 게 아니라 코스 난도와 샷 가치를 높였다는 데에 있다. 5번과 6번에서는 파5 홀이 연속으로 이어지고, 반대로 15번과 16번 홀에서는 해안절벽을 따라 파3 홀이 연달아 전개된다. 또한 초반 10개 홀에 파5 홀이 4개나 배치돼 있다. 이러한 홀의 배치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레이아웃이다.
이 코스를 돌아본 보비 존스는 자신의 골프 이상향을 구현할 설계가로 매켄지를 낙점했고 그렇게 탄생한 곳이 미국 조지아주의 오거스타내셔널이다. 그러나 매켄지는 오거스타내셔널에서 첫 마스터스(당시 3월에 개최)가 열리기 두 달 전인 1934년 1월 눈을 감았다.
골프는 궁극적으로 코스와의 대결이다. 코스의 아름다운 경관 속에 숨겨놓은 설계가의 함정과 유혹을 피해 전략적인 루트를 짜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라운드를 하거나 프로 경기를 관람하면 골프의 묘미는 배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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