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 그 자체다. 캔버스 21개를 이어 붙여 탄생시킨 5미터 높이 왕버들나무의 자태는 거대한 자연을 마주칠 때 받는 압도감과 경이로움을 고스란히 전한다. 그러면서도 소란스럽지 않다. 오로지 흑백으로 표현되는 풍경은 한밤의 고요함과 달빛의 정취로 가득하다.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19일부터 열리고 있는 이재삼 작가의 개인전 ‘달빛녹취록 2020~2024’은 20여 년간 달빛에 매료돼 밤의 풍경을 탐구해온 작가의 예술적 여정이 집약된 공간이다. 작가가 지난 4년간 작업한 결과물을 최초로 공개하는 전시로, ‘달빛’ 연작의 완결판 격이다.
‘목탄(숯)의 화가’로도 불리는 작가는 목탄화의 영역을 새롭게 쌓아올린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목탄을 가리켜 “숲의 영혼을 환생시키는 신성한 도구”라고 일컫는 그는 쉽게 부서지고 가루가 흩날리는 소재의 단점을 메우고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27여 년간을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렇게 완성한 목탄은 작가가 생각하는 회화적 표현을 가장 잘 구현하는 작가만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이번 전시는 ‘수중월(水中月)’, ‘심중월(心中月)’, ‘검묵의 탄생’ 3가지 섹션으로 선보인다. 2층 전시장의 섹션 ‘수중월’은 물속에 비친 달이라는 개념을 시각화한 공간이다. 물안개가 가득한 몽환적인 밤 풍경과 달빛과 어우러진 폭포 등을 묘사한 작품이 이곳에서 전시된다. 특히 캔버스 21개를 결합한 가로 5미터, 세로 22미터의 압도감을 주는 작품이 최초로 공개돼 관객들을 만난다. 작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김제 종덕리의 수령 약 300살 왕버들나무를 모티브 삼아 달빛과 물안개가 자욱한 신비로운 자연의 광경을 구현했다. 5층까지 개방된 공간을 활용해 5미터 꼭대기에 달을 배치, 전시장 전체가 달빛으로 감싸인듯한 느낌도 더했다.
3층 전시장 ‘심중월’은 마음 속의 달을 뜻하며 자연 속에서 생명과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을 표현했다. 전남 광양시 옥룡사지 터의 동백나무 숲을 은은한 달빛이 감싸는 풍경을 목탄으로 구현했다. 이때 검정의 표현은 특히 탁월하다. 검정보다 더 검은, 칠흑 같은 어둠이 작가의 목탄 아래 펼쳐진다. 그리고 깊은 어둠 위로 은은하게 떠오르는 자연, 캔버스를 가득 메운 ‘검은 여백’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공간을 함께하는 관객들을 밤의 한 가운데로 초대한다.
4층 ‘검묵의 탄생’은 작가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제작한 초기 목탄화를 선보이는 공간이다. 극사실주의적 기법이 돋보이는 인물화 ‘저 너머’ 연작과 작가의 자화상 등을 통해 작가가 목탄을 깊이 이해하고 섬세한 표현 능력을 연마하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전시는 4월 20일까지.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