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모든 수입산 철강·알루미늄에 25%의 관세 부과를 실행하겠다는 날(3월 12일)이 16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워싱턴에서 한국 정부의 존재감은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19일(현지 시간) “한 달 안에 자동차·반도체·의약품 등에 대한 관세를 발표하겠다”고 말해 3월 중하순에 또 한번 거대한 파도가 밀려올 것임을 예고했다. 4월 2일부터는 상호 관세 부과가 예상되는 등 우리 경제에 메가톤급 파장을 미칠 일들이 줄줄이 예정돼 있지만 우리나라는 차관보급 인사(산업통상자원부 통상차관보)만 최근 워싱턴을 찾았을 뿐이다.
반면 세계 각국은 부지런히 뛰고 있다. 철강·자동차 등에 대한 관세에 직면한 일본은 이미 이달 7일 미국과 정상회담을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4일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하며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27일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다. 유럽연합(EU) 무역수장 마로시 셰프초비치 EU 무역·경제안보 담당 집행위원도 최근 워싱턴을 찾아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지명자,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지명자를 만난 후 “미국도 관세 인하 의향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브리핑까지 내놓았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까지 나서 미국의 관세에 대한 역내 회원국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업들이 먼저 움직이고 있다. 19~20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필두로 20대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로 구성된 재계 인사들이 워싱턴을 찾아 미국 측 인사들과 만남을 가졌다. 대한상의는 한미 간 빅 프로젝트로 시너지를 내야 한다며 조선, 에너지, 원자력, 인공지능(AI) 및 반도체, 모빌리티, 소재·부품·장비 등을 6대 협력 분야로 제시했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움직이지 못하니 기업 차원의 대응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한상의 발표처럼 지난 8년간 1600억 달러(약 230조 원) 이상을 미국에 투자한 우리 기업이지만 미 재무부와 상무부 측은 누구와 면담을 할 수 있는지 마지막 순간(last minute)에 알려주겠다고 했다는 후문이다. 사절단에 포함된 한 인사는 “미국 상황이 워낙 걱정이 되니까 일단은 찾아왔다”면서 “미국 측에 얼굴도장이라도 찍어야 하지 않겠나”라며 분위기를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이례적으로 일본보다도 먼저 한미 정상 간 통화를 했던 한국이 평상시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이미 조선업 등을 지렛대로 미국과 협상을 진행 중이었을 것이다. 주미한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 통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미국 측에서 총리라면 모를까 대행의 대행과 통화하는 것은 조심스럽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며 난처한 상황을 전했다. 정상 차원의 통화조차 이뤄지지 않으니 실무 차원의 협상은 언감생심이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와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 외려 낫다는 의견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멕시코·유럽·중국 등에 집중해 있는데 굳이 트럼프 대통령의 ‘레이더망’에 들어가 관세 폭탄의 직격탄을 맞을 필요가 있겠냐는 이유에서다. 물론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3월 12일이라는 철강 관세 시한을 발표하지 않았을 때는 유효할 수 있는 전략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 해 280만 톤의 철강재를 미국으로 수출하는 나라가 관세 부과 시점을 통보받은 것이다. 우리 수출 1·3위 품목인 자동차와 반도체에도 고율의 관세를 때리겠다는 마당에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겠다는 ‘은둔의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 정신 바짝 차리고 대응 전략을 짜야 할 엄중한 시기에 두 손 놓고 제 할 일도 못하고 있는 관료들 역시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차일피일 시간을 보내기에는 트럼프 폭풍에 따른 피해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국내 정치 시간표에만 기대면 나라도, 기업도 위기에 처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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