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정체성을 ‘중도보수’라고 칭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을 두고 논란이 일었던 민주당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모습입니다. “하루아침에 정체성을 바꿀 수는 없다”던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더 넓게 아우르자는 뜻”이라고 하는 가 하면 이 대표와 구원이 쌓인 박용진 전 의원도 “확장성 측면에서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내놨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날을 세웠던 앞선 모습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입니다.
이 대표와 ‘회동’ 전후 온도 차가 발생한 것인데 이 대표에게 이유를 묻자 “솔직했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발언을 종합해 보자면 ‘더 넓은 확장성’을 위해 이 대표가 중도보수 카드를 ‘솔직하게’ 설득한 것입니다.
‘흑묘백묘’ 띄우고 딱 한 달 후 나온 ‘중도보수’
실제 이 대표의 중도보수 발언은 여쏙야쏙 51편<“이재명이 이재명하고 있다”…중도보수의 함의>에서도 분석 한 것과 같이 캐치올파티(특정한 계급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자 하는 정당) 전략상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민주당의 보수 진격은 국민의힘이 12·3비상계엄사태 이후 극우 지지층에 집중하며 정치 스팩트럼 상 오른쪽을 비워주면서 가능해졌습니다. 또 진보 깃발로 언제든 공격할 수 있었던 정의당의 당세가 예전같지 않아 후방 부담을 덜게 된 것도 배경입니다.
이런 정치 지형을 두고 지난 한 달 간 이 대표의 우클릭 과정은 드라마틱했습니다. 1월 23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 대표는 ‘흑묘백묘론’을 제시했고 상속세·소득세·부동산세 등 세제 문제를 비롯해 연금 개혁까지 거침없이 우클릭 드라이브를 걸었습니다. 이후 반도체특별법의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두고 노사 간 토론을 직접 주재하며 예외 조항 포함에 힘을 실어주는가 하면 5년 내 성장률을 3% 이상으로 회복시키겠다고 자신하기도 했습니다.
지난달 1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는 ‘잘사니즘(모두 함께 잘살자는 주의)’으로 성장에 무게 추를 더 달았습니다. 이후 상속세의 일괄 공제와 배우자 공제를 각각 상향해 18억 원까지 비과세하자며 여당을 압박했고 같은달 20일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 다녀온 뒤 페이스북에 “국내 생산 촉진 세제 도입”을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한 경제 유튜브에서 출연해서는 “부동산 세금은 손댈 때마다 문제가 돼 가급적 손대지 않아야 한다”며 “1가구 1주택 실거주는 제약할 필요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2월 18일 문제의 중도보수 발언을 합니다. 공교롭게 ‘흑묘백묘론’을 꺼낸 지 딱 한 달입니다. 의도가 있건 없건 결과적으로 타임테이블을 그려 놓고 달려온 한 달인 셈입니다.
이후 이 대표는 박 전 의원에겐 민주당의 “왼쪽”의 역할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김 전 지사에게도 유사한 역할론을 부탁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를테면 ‘좌우겸장’인 셈입니다. 박 전 의원이나 김 전 지사의 반응이 달라진 배경입니다.
우측 공격 중에 김경수·박용진 왼쪽 포지션 요청…‘좌우겸장’
물론 말만 요란했지 실제 입법 성과는 하나도 없는 한 달을 보며 일각에선 ‘낮엔 우클릭 밤엔 좌클릭’이라며 이 대표와 민주당을 힐난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사법리스크보다 경제입법에 시선을 돌리기 위한 전략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그런데도 지난 한 달 정책 주도권과 이슈 선점에서 이 대표와 민주당이 여당을 따돌린 건 사실입니다.
지지층 반발이나 관성 탓에 뚜렷한 입법 성과를 못냈지만 주요 입법 과제를 끌어올린 것 자체가 성과라는 얘기입니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는 “야당 대표의 정책 기조 변화로 경제 입법들이 논의 테이블에 오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며 “접점을 찾은 법안을 중심으로 우선 처리 순서를 정해 국회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자유주의·탈원전 ‘닮은꼴’ 일본 입헌민주당 대승
이 대표도 고민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비상계엄 이후 탄핵 정국으로 이어지는 상황에서 조기대선이 열린다면 가만히 있어도 대권을 쥘 가장 유력한 인물이 이 대표입니다. 그런데도 지지층 반발이나 당내 불만의 목소리가 나올 게 뻔한 경제입법에 나선 것은 외연 확장이 절실해서였습니다. 불과 0.73%포인트 격차로 패배했던 지난 대선 결과도 지지층 결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케이스 스터디로 성공 가능성에 자신감도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 대표와 가까운 한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 입헌민주당을 스터디했다”며 중도보수 벤치마킹 대상이 일본 입헌민주당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민진당에서 보다 개혁적인 인사들이 2017년 탈당해 창당한 입헌민주당은 중도좌파 성향으로 입헌주의, 자유주의, 탈원전주의 등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탈원전 등 한국 민주당과 흡사한 이념과 정책을 가진 입헌민주당은 지난해 총선(중의원 선거)에서 전체 의석수 465석 가운데 148석을 차지했습니다. 입헌민주당의 뿌리인 일본 민주당이 2003년 177석을 차지 한 이후 일본 제1야당이 전체 의석수의 30%이상을 차지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습니다. 앞서 일본 민주당이 2003년 대승을 바탕으로 2009년 자민당 독주를 깨며 정권교체에 성공한 만큼 지난해 총선 결과를 토대로 입헌민주당의 정권획득 가능성도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공산당과도 가깝던 입헌민주당의 우클릭
입헌민주당의 총선 승리는 그동안의 노선과 다른 선거 전략이 유효했던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비자금 사건 등으로 자민당의 인기가 곤두박질 친 것도 약진할 수 있었던 배경이지만 입헌민주당을 이끈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가 그동안 전략적 공천이나 후보 단일화를 해왔던 공산당과는 거리두기에 나서며 중도층을 끌어 당겼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직전 2021년 총선에서는 공산당과의 선거 협력을 통해 후보를 단일화를 했다가 거부감을 느끼는 유권자의 외면에 참패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거울삼아 지난해 총선에선 선거 협력을 하지 않고 ‘일본공산당과 거리 두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총선 한 달 전에 노다는 승기를 잡기 위해 좌파 성향인 당의 기조를 중도 성향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아예 대놓고 말했습니다. 당시 일본 언론은 당의 기조 변경을 내세우며 무당층 표심 얻기에 행보에 나섰다는 해석을 내놨습니다. 선거 캠페인도 ‘두터운 중산층 복원’을 맨 앞에 내걸었습니다. 장기 집권 중인 자민당이 싫어진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이 움직인 순간이라는 평가가 나온 시기입니다. 일본 언론은 노다가 이끄는 ‘우클릭 입헌민주당’에 오히려 안정감을 느낀 유권자가 많았다는 보도까지 했습니다. 말을 바꿔 보겠습니다. 이재명이 이끄는 ‘우클릭 민주당’에 유권자들은 안정감을 느끼게 될까요. 윤석열 대통령 탄핵선고일이 가까워질 수록 이 대표의 우클릭 행보에 관심은 더욱 쏠릴 수 밖에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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