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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김다은의 웹소설] <22회>

연합뉴스




22. 결핍의 정자

내 아파트 단지 앞에는 육각형의 나무 정자(亭子)가 있다. 옆 동과 중간지점이어서 사선으로 눈길이 가는 곳이다. 아침부터 창문을 열어놓고 자꾸 그곳을 쳐다보았다. 급기야 시선이 그곳에 머물러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자 옆에는 벤치들도 드문드문 놓여 있다. 새벽이건 밤이건 사람들이 쉬는 곳은 주로 벤치쪽이었다. 벤치에서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음악을 듣거나 했다. 벤치에는 혼자 앉아 있어도 자연스럽지만, 정자에는 혼자 앉아 있기에 쑥스러운 공간 같았다. 옛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담소하던 공동의 공간이어서 그럴 것이다. 노인들도 제법 있었지만, 서로 대화 나눌 만큼 친분이 없는지 정자에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정자는 그저 풍경에 그쳤다. 그렇게 아무도 찾지 않는 정자에 내가 왜 끌림을 느꼈을까.

정확하게는, 정자가 아니라 정자 곁의 한 모퉁이 빈터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 빈터는 …… 그 여자가 … 서 있었던 곳이다!

쓰레기 수거 날이었으니, 2주 전 수요일이었다. 옆 동 앞에 빈 종이상자들과 신문지 등 종이무더기가 산을 이루며 쌓이고, 그 곁으로 플라스틱류나 비닐류로 채워진 거대한 포대기가 작은 섬들처럼 놓여 있던 날이었다. 그 전날인 화요일부터 시작된 분리수거는 운반 트럭이 오는 수요일 아침까지 이어졌다. 나는 내 아파트 안에서 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 7시 40분경에 대형 크레인이 들어섰다. 트럭이 멈추자 뒤쪽에서 무시무시한 철제집게가 땅으로 내려왔다. 순간 화들짝 놀라서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었다. 강력한 철제집게가 나무 정자 옆에 서 있는 한 여자의 머리를 쳤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 작은 비명을 질렀는데 ……, 여자는 아무 탈이 없었다. 내 시선의 위치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대형 크레인은 무자비하게 종이상자들과 종이 쓰레기들을 움켜쥐고 마치 외계 비행선으로 옮기는 것처럼 하늘로 끌고 올라갔다. 여자의 시선이 집게발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서 고개가 뒤로 젖혀졌고, 나는 쭉 휘어지고 뻗은 여자의 라인을 보려고 창밖의 몸이 아래서 더 내려갔었다.

짧은 반바지에 푸른 티셔츠의 여자!

나는 그곳에 서 있던 여자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젊은 여자가 짧은 반바지를 입은 풍경은 신선했다. 프랑스에서 조깅하러 나온 여자의 모습과 유사했다. 챙이 긴 모자를 쓴 것으로 보아 진작 운동을 하러 나온 것인지도 몰랐다. 모자 때문에 얼굴은 전혀 알 수 없었는데, 모자를 벗어도 모르는 여자였을 것이다. 그녀의 스타일로만 봐도 이전에 보았다면 기억했을 것이다. 하늘로 끌려 올려지는 쓰레기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며 몸이 뒤로 휘는 모습이 눈을 휘감았었다. 다들 바쁜 아침에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여자가 있구나 싶어서 여운이 남았었다. 그런데,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들이 안개처럼 사라져 가버린 지금, 안개 뒤의 나타난 선명한 물체처럼 그 여자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은연중에 나는 본능적으로 여자에게 끌리는 남자로 되돌아온 것이다. 정자의 모퉁이 빈터에 서 있던 여자의 실루엣이 너무나 생생해서 착각이 일 정도였다. 보이지 않지만 보였다. 보였지만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쓰레기 수거 날도 아니고, 여자가 그곳에 올 이유가 없었다. 쓰레기 수거 날이라도 그날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그녀를 생각하자, 몸 안의 수컷 정서가 춤을 추듯 흔들렸다.

한 마디로, 여자가 그립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애도해야 하는 시기에, 인간의 육체적 메커니즘은 이렇게 터무니가 없다. 부도덕하게 느껴져서 심란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파티에서 만난 국내외 커리어우먼, 영화 레드카펫을 걸었던 아름답고 화려한 배우들, 외교계나 예술계의 세련되고 심지어 특이한 여자들을 무수히 수첩에 적어두고서도, 세상의 쓰레기에 매료되어 눈을 떼지 못하는 한 여자에게 빠진 나의 취향이 당황스러운 것이다. 세상에서 추락하니 여성에 관한 취향도 저절로 바뀐 것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녀가 어떤 여자이건 간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찾아온 감정이었다. 문제는 미치도록 보고 싶은 것이다. 갑자기 몸 안으로 도파민이 폭발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닥뜨렸던 상황에서 강렬한 아드레날린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면, 당연한 수순처럼 도파민이 이어서 폭발했다. 새로운 동기부여나 목표물을 찾아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나오는 몸의 신경전달 물질이었다. 불안과 좌절에 침체 되었던 인간이 다시 희망을 찾으려는 본능 때문에 솟구치는 도파민! 그런데 그것이 여자 쪽으로 흘렀다. 세상의 명예나 돈 그리고 물질에서 이미 가치를 상실한 인간이 다시 동일한 분야에서 동기나 목표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라도, 세상의 멋진 여자가 아니라 전혀 모르는, 몰라도 되는 미지의 여자를 새로운 동기부여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이런 분석은 불필요한 것이다. 몸을 꿈틀거리게 만드는 욕정이 다시 돌아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여전히 기억의 저장고에 남아 있는 여자 S. 육각 정자 모퉁이의 여자가 S와 뭔가 공통점이 있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눠보지도 않았는데, 처음 본 순간부터 광기에 빠져버리는 징후가 비슷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운명의 상대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첫눈에 반하는, 소위 운명의 상대라고 빠져드는 남녀관계의 위험성을 이미 S를 통해 체험했다. 그 위험한 운명이 다시 시작되었다면, 저 정자의 모퉁이에서였을 것이다.

S와의 광기 어린 경험이 끝나고 나는 여자에게 관심을 잃었다. 그런 강렬한 감정과 몸정을 대신할 여자가 있을 수 없었다. 더구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자에게 안정감을 주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성향을 갖지 못했다. 여자들이 원하는 충분한 시간과 다정함과 배려를 주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아름답지만 쉬크하게 자신에게 집중하는 여자와 연인처럼 지내다가 스스로 떠나가면 끝을 맺곤 했다. 그래서 끊어진 관계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워서, 다시 연락하면 다시 만나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지금, 나는 쓰레기에 반한 여자에게 반해버린 것이다. 지금 느끼는 정욕은 그래서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결핍에 가까웠다.

내가 바람둥이여서가 아니다. 나는 짧은 시간에 물질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고, 생애 처음으로 최고의 결핍 상태이다. 모든 것이 충족되던 과거의 시간은 사라졌고, 충족했던 시간 속에 있던 여자들도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반면에 세상의 보석이나 명품 가방이 아니라 세상의 쓰레기를 바라보며 서 있던 여자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세상의 쓰임새를 다하고 버려지던 쓰레기에 시선을 맞추고 있던 여자! 어쩌면 나도 세상의 쓰레기에 시선을 맞추고 매료된 채 살아온 것 같았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서 나의 페르소나를 보았다. 그녀가 집게발의 철퇴를 맞는 듯한 순간에, 창밖으로 내밀었던 내 몸에 어떤 에너지가 강렬하게 휘감았었다.

여자를 끊임없이 더듬고 있는 것은, 내가 나를 찾고 싶어서일 것이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는, 내가 나와 다시 한 몸이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 결핍의 정자는 보통의 성욕보다 강했다. 나를 낳아준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온 후 아들의 온몸은 생명을 갈구했고, 가장 쉽게 여자를 탐하고 싶었다. 뱀과 새 사이의 유혹의 계략이 이런 것이었다. 뱀과 새의 실험에서 나는 새였다. 나는 케이지 안에서 혼자 자유롭게 날고 있었는데, 이어서 뱀이 내 케이지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고 밑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자 새는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나는 그 여자가 궁금해서 시선을 맞추고 대화하고 싶다. 아니 가까워지고 싶다. 나는 꿈틀거리는 뱀의 관능적인 몸을 접촉하고 싶다. 만지면 매우 매끄럽고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낮은 가지로 점점 내려가서 여자 앞까지 가고 싶다. 더 다가가고 싶다. 그리고 그 여자의 쩍 벌린 입안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정말이지, 삼켜지고 싶다!

▶다음 회에 계속 …



김다은은 ‘당신을 닮은 나라’가 1995년 제3회 국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덕중의 정원’ ‘훈민정음의 비밀’ ‘쥐식인 블루스’ 등 20여권 소설책을 출간하고, 다수 번역돼 해외 소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한 폴란드 바르샤바대학 작가 레지던시를 비롯, 청송 객주 문학관,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레지던시, 해남 인송문학촌 토문재 레시던시에 참가했다. 이화여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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