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쇠락을 거듭하던 유럽 경제가 최근 꿈틀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종전 협상에서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패싱’하고 러시아와 밀착하자 유럽 국가들의 안보 위기가 높아졌고, 방위비를 포함한 대대적인 재정지출 계획을 꺼내 들면서 시장이 활기를 되찾은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독일의 대표 주가지수인 DAX는 5일(현지 시간) 2만 3081.03에 거래를 끝내며 전 거래일 대비 3.38% 급등했다. 건설·방산·은행 등 여러 업종이 두루 올라 2022년 이후 가장 큰 일간 상승률을 기록했다. 독일 시장의 초강세는 범유럽 증시도 끌어올려 이날 유로스톡스600지수는 0.91%의 상승률을 나타냈다.
유로화도 강세다. 이날 달러·유로 환율은 전일 대비 1.53% 상승한 1.078달러에 거래됐다. 이는 지난해 1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유로화는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1.02달러 선에서 거래됐지만 이날에는 1% 이상 상승해 약 4개월 만에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고 분석했다.
유럽 시장이 들썩인 것은 유럽 대륙의 ‘돈풀기’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커져서다. 앞서 유럽연합(EU)은 일명 ‘유럽 재무장 계획’을 통해 8000억 유로(약 1229조 원) 규모의 방위비 확보 구상을 제안했다. 여기에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에서도 향후 10년간 인프라 투자 등에 사용할 5000억 유로의 기금을 조성하는 한편 방위비는 무제한 차입을 허용하도록 하겠다는 정책이 나왔다. 지난해 독일 정부의 예산이 4657억 유로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과감한 결단에 나섰다는 평가가 따른다. 그간 수차례의 금리 인하에도 살아나지 못했던 유럽 경제가 과감한 재정 투입 기대로 되살아나는 분위기가 확연하다는 분석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번 계획은 20년 이상 유지돼온 독일의 재정적 보수주의와 결별하는 것”이라면서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정부 지출이 급증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유럽 성장률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뒤셀도르프 하인리히 하이네대’ 국제경제학팀은 독일의 인프라 투자에 대한 승수를 1.5로 추정하고 있다. 5000억 유로의 인프라 기금 조성으로 향후 10년간 국민소득 증대에 약 7500억 유로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의미다.
투자은행(IB)들도 유럽 성장률 전망치를 잇따라 올리고 있다. 당초 골드만삭스는 올해 독일의 경제성장이 정체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최근 투자 계획이 알려진 후 성장률 전망치를 0.2%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내년 성장률도 앞선 전망보다 0.5%포인트 높인 1.5%로 제시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의 성장률 예측치도 올해와 내년 각각 0.1%포인트, 0.2%포인트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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