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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살이 여행도 가요” 파브리병, 주사 대신 먹는 약 바꾸니 [메디컬 인사이드]

■ 이범희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교수

파브리병, 4만~6만명당 1명 꼴로 발생…국내 환자 300여명

희귀질환 중 드물게 치료제 있지만 상당수는 ‘진단 방량’ 겪어

이틀에 한번 먹는 치료제 등장으로 삶의 질 획기적으로 개선

전 세계 유일하게 ‘2차치료’ 기준 적용…제도 개선 목소리도

이미지투데이




"올 여름에는 아내와 유럽 여행을 가보려고 합니다. 2주 여행 코스면 동유럽 5개국 정도를 둘러볼 수 있겠더라고요. 2주마다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와야 했을 땐 엄두도 못냈을 일이죠. "

파브리병으로 20년 가까이 투병 중인 서경제(60대·가명) 씨는 "먹는 약으로 바꾸고 두 달에 한 번만 병원에 오니 이제 좀 살 것 같다"며 웃어보였다.

◇ 신생아 선별검사 도입 후 유병률 높아졌지만…파브리병 환자 200~300명에 불과


인체의 세포 내에 존재하는 리소좀은 세균 등 이물질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브리병은 이 리소좀에서 당지질 대사에 관여하는 효소가 결핍돼 발생하는 희귀 유전질환이다. 'α-갈락토시다아제 A' 효소의 활성이 결여되거나 부족하다 보니 혈관벽에 글라보오실세라마이드(GL-3)와 같은 당지질이 축적되고 차츰 피부, 눈, 뇌, 말초신경, 콩팥(신장), 심장 등 다양한 장기에 문제를 일으킨다.

사진 설명


과거에는 인구 11만 7000명 당 1명 꼴로 발생한다고 알려졌는데, 신생아 선별검사 도입 이후 파브리병의 국내 유병률은 4만~6만 명 당 1명 수준까지 높아졌다. 하지만 유병 인구가 많지 않고 질환 인지도가 낮다 보니 적지 않은 환자들이 진단을 제대로 못 받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파브리병 환우회인 파브리코리아가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파브리병 증상 발현 후 치료까지 평균 15.5년 가량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 1989년 파브리병 환자가 처음 보고된 이후 지금까지 진단받은 환자가 200~300명에 불과한 건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 장기 손상 막으려면 조기 진단 필수…치료시기 놓치면 조기 사망 위험도


파브리병은 완치가 되지 않는 진행성 질환이다. 비가역적인 손상을 되돌릴 수 없으니 현재로선 장기 손상이 일어나기 전에 질환을 발견해 치료를 시작하는 게 최선이다. 부족한 효소를 보충하거나 대체하면 각종 세포에 축적되는 지방을 줄일 수 있다. 2022년 국제학술지 유전학 사례보고서(Case Reports in Genetics)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파브리병 증상 발현 후 일찍 치료를 시작한 38세 여성은 비교적 안정적인 컨디션을 유지한 반면 뒤늦게 치료를 시작한 65세 여성은 이미 장기 손상 및 합병증이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서씨는 40대 초반에 증상이 발현됐고 10년 넘게 주기적으로 효소대체요법(Enzyme Replacement Treatment)을 받았다. 다행히 병의 진행이 더딘 편이라 심장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두꺼워지는 '심장비대' 외에는 별다른 합병증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범희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교수가 파브리병의 급여 기준 개선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제공=서울아산병원


이범희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교수는 "40대에 만성 신부전으로 진행돼 투석을 받으면서도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는 못하는 환자가 수두룩하다"며 "파브리병의 진단과 치료가 늦어져 신장 및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등 치명적인 합병증이 동반되면 40~50대에 사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희귀질환 중에서는 드물게 치료제가 여럿 있는 데도 기회를 놓치는 환자들이 있어 안타깝다는 얘기다.

◇ ‘먹는 약’ 등장에 획기적인 변화…이틀에 한번 알약 먹으며 질환 관리


6년 전만해도 파브리병 환자들에겐 2주마다 부족한 효소를 채워주는 정맥주사제가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다국적 제약사가 개발한 '파브리자임', '레프라갈' 외에도 국내 기업인 이수앱지스(086890)가 개발한 바이오시밀러 '파바갈' 등이 있고 건강보험도 적용된다. 다만 2주마다 정맥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야하고, 한 번 치료받는 데 적게는 3시간에서 많게는 6시간 가량 걸리니 불편함이 컸다. 회당 치료시간이 6시간이라고 가정하면 1년에 156시간, 10년이면 1560시간이다. 서씨의 경우 치료 효소를 맞을 때마다 열이 나거나 견디기 힘든 수준의 복통에 시달렸다. 일부 환자는 효소치료제 투여 시 이러한 부작용을 겪는다. 외부 물질이 체내에 들어왔을 때 우리 몸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일으키는 일종의 면역반응이다.

하지만 알약 형태의 '갈라폴드(성분명 미갈라스타트)'가 국내에 도입되면서 극적인 변화가 생겼다. 격주로 병원을 찾아 주사를 맞을 필요없이 이틀에 한 번씩 같은 시간에 약을 복용하면서 파브리병을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두려움에 떨게 했던 부작용에서도 자유로워졌다. 갈라폴드는 아미커스 테라퓨틱스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경구용 파브리병 치료제다. 국내에서는 한독(002390)이 판권을 확보해 순응변이 유전자를 가진 파브리병 환자의 장기간 치료 용도로 2017년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았다. 경구용 약물은 효소를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의 효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적응증에 맞으면 한 번에 60일치를 처방 받을 수 있어 1년에 6번만 병원에 가면 된다.

◇ 전 세계에서 한국만 경구약 문턱 높아…제도 개선 요구 목소리도


순응변이로 확인됐더라도 처음부터 경구용 약물 처방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1년 이상 주사제인 효소대체요법을 사용해야 보험이 적용된다. 경구용 약물의 보험 적용 기준을 16세 이상으로 높게 잡고 2차 치료제로 제한한 국가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이 교수는 "파브리병의 경구용 약물과 기존 주사제를 비교한 연구 데이터가 이미 많이 나와있다. 2차 치료제로 썼을 때만 보험을 적용해준다는 것은 상당히 시대에 뒤쳐진 기준"이라며 "제도적인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파브리병 뿐 아니라 수천 가지 희귀 유전질환의 조기 진단을 돕고 치료 기회를 앞당기기 위해 유전 상담서비스의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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