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남유럽 재정위기로 촉발된 ‘부채 위기’라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채비를 하고 있다. 유럽을 깨운 것은 냉전 이후 이어져 온 ‘대서양 동맹’ 체제를 무시하고 러시아와 밀착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다. 유럽연합(EU)은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재정준칙이라는 족쇄를 과감하게 풀기 시작했고 대신 1300조 원에 육박하는 막대한 확장 재정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재정발(發) 경기 부양에 대한 기대감은 유럽 통화와 주식시장의 활기로 이어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시장이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대신 ‘메가(MEGA·유럽을 다시 위대하게)’를 원하고 있다”는 논평까지 내놓았다.
8일(현지 시간) 주요 외신에 따르면 EU와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이 마련한 재정 동원 계획은 천문학적인 규모로 평가된다. EU가 마련한 ‘재무장 계획’은 8000억 유로(약 1260조 원) 규모이며 독일은 앞으로 10년간 군비 확충과 인프라 투자에 쓰기 위해 5000억 유로(약 786조 원)의 특별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다. 주목할 점은 이를 위해 재정에 채웠던 족쇄를 풀었다는 것이다. EU 집행위원회는 회원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간 재정적자 비율을 국방 부문에 한해 느슨하게 적용, GDP 대비 3%로 제한했던 재정적자 비율을 최대 1.5%포인트까지 추가로 늘릴 수 있도록 했다. 지난달 총선에서 승리한 독일 기독민주당(CDU)도 현 집권당인 사회민주당(SPD)과 GDP의 1%가 넘는 부채를 허용하는 내용의 기본법(헌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꿈틀대는 유럽이 촉발할 자금 흐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유로화는 지난 한 주 4.5%나 치솟아 금융위기 때인 2009년 이후 최대 상승 폭을 기록했고 뉴욕증시가 트럼프 행정부의 전방위 관세에 힘이 빠진 사이 유럽 증시는 급등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글로벌 무역 전쟁, 유럽 재정 부양책이 글로벌 자금 흐름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며 “자금이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향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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