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재정 족쇄’를 깨고 막대한 돈 풀기에 나선 직접적인 원인은 국방력 강화다. 전통적 우방인 미국이 방위비 증액을 압박하는 한편으로 러시아와 밀착하면서 유럽연합(EU) 내부에서 ‘미국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자강론이 거세진 것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최근에는 자동차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유럽 자동차 부문 산업행동계획’을 내놓았다. 중국산 저가 전기차 공세에 맞서는 한편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이는 ‘관세전쟁’에 대응하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시장에서는 벌써부터 유럽 확장재정의 ‘낙수 효과’를 예상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주요 투자은행(IB)들은 5000억 유로(약 786조 원)에 달하는 재정 카드를 꺼내 든 독일의 경제성장률을 경쟁적으로 올려 잡고 있다. 골드만삭스와 BNP파리바는 올해 독일의 국내총생산(GPD) 성장률을 기존보다 각각 0.2%포인트, 0.5%포인트 상향 조정했다. 미국 매체 폴리티코는 “시장이 유럽의 ‘워 본드(war bond)’에 굶주려 있다”는 논평까지 내놓았다.
이는 유럽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PIGS(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명명된 남유럽 재정위기를 순차적으로 겪으며 침체됐던 지난 20여 년과 전혀 다른 흐름이다. 당시 유럽 전역에 위기감을 전염시킨 그리스(158%·지난해 3분기 기준)와 이탈리아(135%), 스페인(108%) 등 국가들은 여전히 GDP 대비 높은 부채비율을 유지하고 있다. EU가 2010년 그리스 재정위기를 계기로 회원국들의 연간 재정적자와 부채비율을 GDP 대비 각각 3%와 60%로 묶은 규정을 지금까지도 유지해온 이유다. EU는 엄격한 재정준칙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를 제외하고는 금기처럼 지켜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럽 지도자들이 재정 정의 필요성에 눈을 떠 금기를 허물기 시작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시장의 평가도 긍정적이다. 최근 글로벌 국채 시장에서 최대 화두는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의 국채 수익률 급등이다. EU 최대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독일의 10년물 국채 수익률은 7일(현지 시간) 2.833%로 연초 대비 19% 이상 껑충 뛰었고 프랑스(9.9%)와 영국(0.9%) 국채 10년물도 수익률이 올랐다. EU가 8000억 유로(약 1260조 원)에 달하는 확장재정을 위해 대규모 국채 발행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커지면서 국채 매도로 이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유럽의 확장재정발(發) 경기 부양 신호탄으로 보고 있다. 프랑스 금융회사 아문디의 마흐무드 프라단 글로벌 매크로 부문 책임자는 “(국채 수익률 상승은) 경제 전망이 개선되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이달 6회 연속으로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도 “통화정책이 의미 있는 수준에서 덜 제약적인 기조로 전환하고 있다”고 밝힌 것도 경기 확장에 따른 인플레이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평가다.
유럽 증시가 방산주 중심으로 랠리를 펼치는 것도 확장재정의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전방위 관세 부과에 뉴욕 증시에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1.68%)과 나스닥(-5.63%)은 연초 대비 하락하며 고전을 하고 있다. 반면 독일 DAX(14.90%), 영국 FTSE(5.08%), 프랑스 CAC(9.83%) 지수는 모두 올해 초보다 올랐다.
EU는 위기에 처한 역내 자동차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 ‘바이 유러피언(buy European)’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집행위원회는 5일 역내 자동차 업계의 친환경 전환과 경쟁력 확보를 지원하기 위해 추진하려는 정책을 망라한 ‘유럽 자동차 부문 산업행동계획’을 발표했다. 전기차의 핵심으로 꼽히는 배터리 산업 지원에 초점을 맞췄다. 2030년까지 배터리 가치사슬 전반의 ‘유럽산 부가가치 비율’을 50% 수준으로 높이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이를 위해 향후 2년간 18억 유로(약 2조 8000억 원)를 배터리 제조 업체의 생산라인 확대에 지원하는 ‘배터리 부스터’ 정책 패키지를 내놓기로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글로벌 자금이 유럽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전망도 힘을 얻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12월 유럽 지역 펀드매니저들의 유럽 시장 자금 배분은 마이너스였지만 올 1월 플러스로 돌아섰다고 전했다. BofA의 외환전략책임자인 데이비드 하우너는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미국 우선주의를 말하던 올해 신흥시장·유럽 등 다른 곳이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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