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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캡틴 아메리카’는 더 이상 없다

■정민정 국제부장

2차 대전 후 '세계의 경찰' 자처한 美

트럼프 재집권에 '미국 우선주의' 뚜렷

오락가락 관세 폭탄, 美 경제 부메랑

정교한 전략으로 격변 속 국익 지켜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일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가진 2기 첫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미국의 황금 시대가 돌아 왔다”며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요즘 극장가에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가 상영 중이다. 마블코믹스의 슈퍼 히어로 중 맏형 격인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1년여 전인 1940년 12월 탄생했다. 평범한 인물이 초인적 힘을 갖고 악당과 맞서 싸우는 캡틴 아메리카의 영웅담에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전쟁이 끝난 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미국의 이미지에는 ‘캡틴 아메리카’가 오버랩되곤 했다.

미국은 1·2차 대전 이전만 해도 유럽과 거리를 두는 고립주의가 득세했다. 그러나 파시즘 위협에 직면하자 적극적으로 국제 질서에 개입했다. 미국은 유엔과 같은 제도와 다수의 동맹을 구축해 국제 안보 질서를, 브레턴우즈 체제로 불리는 국제통화 체제와 자유무역 질서를 확립해 국제 경제 질서를 관리했다.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은 “세계 유일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동맹들에게 글로벌 안보 체제, 자유로운 시장 접근 등을 보장했으며 세계는 유례없는 번영과 평화를 구가했다”고 짚었다.

‘캡틴 아메리카’ 덕에 전 세계가 누렸던 호시절도 이제는 끝이 보이는 듯하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호구(sucker)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과 함께 세계는 낯선 오늘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유엔총회 현장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규탄하는 결의안 현황판의 미국명 옆에 ‘반대’를 의미하는 붉은색 램프가 켜졌다. 러시아와 북한, 이란 등과 미국이 같은 편에 선, 생소한 장면이었다. 트럼프 대통령 2기 첫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도 ‘미국 우선주의’ 기조는 선명했다. “미국이 돌아왔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미국의 황금시대가 시작됐다”는 자찬, 그리고 ‘트럼프식 분열의 정치’로 가득 찼던 ‘100분’이었다.

‘트럼프 시대’를 실행할 ‘전가의 보도’는 관세다. 그는 지난달 멕시코·캐나다에 대한 25% 전면 관세, 중국에 대한 ‘10+10%’ 관세를 밀어붙이며 ‘관세 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캐나다와 멕시코에 엄포와 유예를 반복하다가 다음 달 시행을 예고했지만 캐나다에는 난데없이 목재와 낙농 제품에 25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한다. 12일 철강·알루미늄에 25% 관세를, 다음 달에는 전 세계를 상대로 ‘상호 관세’를 예고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사정권에 들어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의 평균 관세는 (미국보다) 4배 높다”며 비난했다. 사실이 아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거래 품목의 99% 이상이 무관세다. 반도체법을 두고도 “없애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전임 행정부의 정책을 믿고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삼성전자·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날벼락이다.



시장은 요동치고 있다. 지난주 뉴욕 증시는 급락했고 주요 투자은행들은 미국의 경기 침체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CNN은 “트럼프의 ‘채찍질(whiplash)’ 리더십에 세계가 지치기 시작했다”며 꼬집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만들어온 자유무역 체제를 1930년대식 보호무역 체제로 퇴행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캡틴 아메리카’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가치 동맹 대신 ‘힘’과 ‘돈’의 논리가 국제 관계를 지배하면서 각자도생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트럼프식 거래에 휘둘리지 않도록 정교한 전략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이럴 땐 손에 쥔 카드가 무엇이냐에 따라 처지가 갈린다. 조선·에너지·반도체 등 트럼프가 중시하는 산업에서 윈윈할 수 있는 협력 방안을 제시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2023년 미국의 최대 투자국으로 일자리를 가장 많이 창출했다는 사실도 알려야 한다. 미국 내 ‘표심’도 공략할 필요가 있다. 공화당 지지 성향이 강한 주(州)를 지역구로 둔 정치인들과의 접점을 늘려 이를 지렛대로 백악관을 움직여야 한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낸다”고 했다. 어떻게 위기를 넘기고 기회를 잡을지는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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