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2년 임기의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12일 퇴임했다. 이임식에 앞서 정 이사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답답해 죽을 지경”이라며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이임사를 올렸다.
20년 전 12일은 공교롭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날이었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탄핵소추안 가결이었다. 파란만장한 노무현 대통령의 삶 가운데서도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전국에서 탄핵 반대 촛불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4월 15일 총선에서는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얻어 여대야소 국회로 전환됐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의 탄핵안 기각 결정으로 탄핵사태는 종결됐다.
20여 년이 지난 2025년 3월 12일, 대한민국은 여전히 대통령 탄핵 심판이라는 대혼돈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벌써 세 번째다. 거리는 탄핵에 찬성하는 또는 반대하는 국민으로 전선이 만들어졌다. 상대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넘실거린다. 거리에 직접 나서지 않은 국민 대다수도 답답해한다.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와 미래를 생각하면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정세균 노무현재단 이사장. 6선 국회의원으로 국회의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여느 정치인과 좀 다른 점은 그의 ‘화법’이다. 거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뭐든 부풀려 말하기를 싫어한다. 좀처럼 속내를 잘 드러내지도 않는다. 직설적이고 호방한 노무현 대통령과는 달리 그의 말에는 감정이 잘 묻어나지 않는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그런 그가 노무현재단 이사장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서 “답답해 죽을 지경”이라고 했다.
정 이사장은 이임사에서 “재단 이사장으로 3년 봉사했으니 이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진 빚을 절반쯤 갚은 셈”이라며 운을 뗐다. 노무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본 2009년 2월, 민주당으로 복당해 달라는 말을 건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빚진 마음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는 이임사 내내 ‘정치의 실종’을 답답해했다. ‘경고성 계엄령’을 선포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이라며 ‘상식이 통하는 세상’과 점점 멀어져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며, 지금은 그런 정치가 사라진 세상에 살고 있다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정치가 사라진 결과 “몰상식이 상식이 되고 비정상이 정상인 것처럼 행세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애둘러 평가했다. 지난달 4일 서울대에서 열린 ‘개헌 대담회’에서도 그는 정치의 실종을 비판했다. ‘무책임한, 극단적인 정당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라며 정치의 복원을 호소했다. 정치하는 사람에게 정치가 사라진 공간은 얼마나 답답한 세상일까?
정 이사장은 재단 관계자들에게 “노무현이 꿈꾸던 세상에 대한 연구를 넘어, 그 세상을 어떻게 빨리 맞이할 것이냐에 집중하자”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진보적 열정을 가진 노무현의 후예들이, 노무현보다 더 노무현답게,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세상을 열어가자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제가 할 일이 있다면 이야기해달라”는 여운을 남기며 노무현 대통령께 드리는 편지 이임사를 마무리했다. 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임기를 연장해 이사장 직을 계속 맡아달라는 재단의 요청을 본인이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님, 저는 이제 노무현재단 이사장 임기를 마치고 물러납니다. 벌써 3년이나 됐습니다. 잘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성격 잘 아시겠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대통령님을 본 날이 2009년 2월입니다. 그때, 제가 왜 봉하에 왔는지 좀 의아해 하셨지만, 부산에 간 김에 그냥 들렀습니다. 무척 반가워 해 주셨죠. 그런데 얼굴에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것까지 숨기지는 못하시더군요.
그날, 민주당에 복당해 달라고 말씀드리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습니다. 민주당이 국민의 지지를 얻어 좀 더 강했더라면 대통령님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졌을까? 마음이 정말 아팠습니다. 그렇게 빚진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재단 이사장으로 3년 봉사했으니 이제 절반쯤은 빚을 갚은 셈 치겠습니다.
대통령님과 저는 친하게 지낼 기회가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잘 안 맞았습니다. 저는 호남에 기업 출신인데, 대통령님은 영남 출신에 노동계를 대변하는 투사였습니다. 저는 비교적 예측 가능한 사람인데, 대통령님은 정 반대셨죠. 대통령님은 늘 뭔가 일을 벌이려고 했고, 저는 현실을 중시하면서 일을 수습하는 편이었습니다.
가끔은 대통령님의 직선적이고 호방한 스타일이 부러웠지만, 저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야 하는 말인데, 저는 대통령님이 어색하고 불편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긴 저도 항상 고분고분하지는 않았죠.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우리가 그 오랜 세월 동안 싸우지 않고 함께한 것 자체가 신기합니다.
그래도, 함께 한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정치할 맛이 나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초선 시절에 현대차 파업 중재를 위해 함께 갔던 현장에서 대통령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등이 있을 때 나서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정치의 본령 가운데 본령이다.”
우리는 그게 정치라고 배웠고, 그렇게 하려고 힘껏 노력했고, 그렇게 하면서 정치하는 재미와 보람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뭐가 달라진 게 있냐고 물으신다면,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좀 어떠신가요? 답답하시죠? 저도 답답해 죽을 지경입니다. 대통령님께서 귀가 닳도록 말씀하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이렇게 어려운 일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상식과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몰상식이 상식이 되고, 비정상이 정상인 것처럼 행세하는 세상입니다. 경고 삼아 계엄령을 선포하는 세상이니 달리 더 무슨 말씀을 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고도, 최소한의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세상입니다.
이러다간 푸념이 끝도 없겠습니다. 우리 노무현재단에 대해서도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재단이 미래를 봐야 하는데 아직은 과거에 많이 머물러 있습니다. 아마도 대통령님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많이 남아서 추억의 끈을 놓기 싫어 그런 듯합니다.
그러나 이젠 과감하게 미래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노무현이 꿈꾸던 세상이 무엇이었는가를 넘어, 그 세상을 어떻게 빨리 맞이할 것이냐에 집중해야 합니다. 대통령님께서도 동의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새로 취임하는 차성수 이사장에게 전하겠습니다.
그리운 노무현 대통령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진보적 열정을 가진 노무현의 후예들이 결국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노무현보다 더 노무현답게 해나갈 것입니다. 저는 비록 재단을 떠나지만,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야기해 주십시오. 꿈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전국의 회원 여러분, 재단 직원 여러분,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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