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드 라투르의 회화는 완전한 어둠, 빛의 절대적인 부재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마치 조물주가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던’ 것처럼 작은 빛이 화면에 등장한다. 붓의 한 획에 실린 작은 빛이다. 하지만 암갈색의 어둠을 추방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밝기다. 소년의 손에 들린 촛불이 거대한 흑암을 조금씩 물리치면서 사물의 윤곽이 드러난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아니어도, 거짓과 계략을 뒤로 물리는 힘이 빛의 본연이다. 라투르 회화의 불변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불꽃을 보세요. 공기의 흐름, 어떤 움직임이나 소음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관장 필립 드 몬테벨로는 경탄한다. 평화로운 정적 속에서 아름다움과 질서가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을 보라. 빛은 요동하지 않으면서 감상자의 호흡을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장식음·과장·몽상 같은, 일체의 저급함을 다 덜어낸 듯한 묘사가 라투르의 스타일이다. 빛은 꼭 필요한 만큼이다. 인물의 성격과 사물의 체계가 드러나는 정도다. 1640년대에 그려진 ‘목수 성 요셉’의 주제는 아버지와 아들, 요셉과 어린 예수다. 나무 깎는 칼과 나무망치, 둥글게 말린 대팻밥은 아버지의 직업이 목수임을 알려준다. 이미 날이 저물었지만 아버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가족을 부양하는 숭고한 노동이다. 노동으로 단련된 그의 굵은 팔뚝은 아들의 밝은 미래에 대한 담보다. 노동은 곧 기도다. 아버지의 시선은 빛에 맞춰져 있고 허리를 숙인 경배자의 모습이다.
빛은 정작 아들에게서 온다.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소망이다. 촛불은 아들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한다. 아들의 시선은 캔버스 너머를 향해 있다. 초월을 암시하는 시선 처리다. 촛불보다 더 강렬한 빛이 어린 아들의 얼굴에 맺혀 있고 촛불은 손에 가려져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투르의 빛은 광학 차원이나 유물론자의 것과는 다르다. 굳이 초월을 논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라투르의 빛의 회화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윤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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