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은 외국의 전쟁과 국제적 모략에 끼어들기를 꺼린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동맹 관계를 경고한 조지 워싱턴의 고별사는 지금도 정부의 외교정책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을 응원하고 이를 파괴하려는 세력을 비난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미국 전역에는 민족해방을 위해 러시아의 압제에 맞서 싸운 18세기의 폴란드 애국자 타데우시 코시우슈코 장군과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대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한 19세기의 헝가리 독립투사 코슈트 러요시와 같은 위인들의 동상이 서 있다. 이들은 당시 힘없는 신생국가에 불과했던 미국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14년 독일의 벨기에 침공 당시 미국은 비록 직접적인 무력 개입은 하지 않았지만 침략 전쟁의 피해자를 돕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식량 지원에 조직적으로 나섰다. 냉전기에도 군사 지원은 제공하지 않았으나 워싱턴은 소련의 발틱 3국 합병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이들 3개국은 당당한 독립국가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슈퍼 파워로 등극한 후 베트남·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미국이 현명치 못하게 행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조차도 미국이 추구한 목표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였다.
지금은 다르다. ‘백악관 참사’로 정점을 찍은 최근 미국 외교는 이제까지 우리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민낯을 보여줬다. 미국의 대통령은 전쟁을 일으킨 침략자와 맞서 싸우는 피해자 측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은 얼마 전 백악관을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미국의 지원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라고 윽박지르며 “무례하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 광경은 현장 취재진의 카메라를 통해 미 전역에 고스란히 생중계됐다. 젤렌스키는 그동안 기회가 닿을 때마다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 바 있다.
이번 회담에서 젤렌스키가 저지른 잘못이라면 트럼프의 면전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2015년 실제로 휴전에 합의했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를 지속적으로 위반했다는 사실을 몇 차례 반복해 지적한 것이 전부였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와의 삿대질 정상회담을 자신과 푸틴 사이의 특별한 유대감을 상기시키는 도구로 활용했다.
젤렌스키도 트럼프·밴스 협공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트럼프에게 도를 넘는 반응을 보였고 밴스가 던진 미끼에 쉽사리 걸려들었다. 그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트럼프를 어떻게 다뤘는지 사전에 공부했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줄기찬 칭찬과 경의로 트럼프의 비위를 맞췄다.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 당시 그가 상대해야 했던 미국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그 어떤 사랑꾼도 내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꼼꼼히 연구했던 것만큼 애인의 변덕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서 살펴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젤렌스키는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전시 상황에서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다. 그는 생존을 위해 싸우는 중이다. 그리고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인들은 끊임없이 미국을 약화시키고 미국의 국익과 우방국들을 적극적으로 해치려 하는 탐욕스러운 독재주의에 맞서 건국 이래 미국이 일관되게 지지해온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쪽의 입장을 지지해야 할지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백악관의 유례없는 외교 참사가 일어나기 몇 주 전부터 트럼프 행정부는 우방국들을 상대로 불량배처럼 행동했다. 캐나다에 독립국가의 지위를 포기하고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할 것을 요구했고, 덴마크에는 그린란드 매각, 파나마에는 파나마운하 이전을 압박했다. 적보다 우방국에 더 높은 관세를 때리겠다고 공언했고 세계 최빈국들에 약속했던 거의 모든 식량과 약품 지원 프로그램을 중단시켰다.
보수적 성향의 전 영국 내각 장관인 로리 스튜어트는 트위터의 후신인 X에 트럼프 행정부에 일침을 가하는 질문을 던졌다. “미국이 장장 80년에 걸쳐 강력한 힘과 동맹을 구축한 것이 이를 위해서였나? 이웃을 가난에 빠뜨리고, 이제껏 보호해온 사람들을 위협하고, 전쟁에 찢긴 국가의 광물을 훔치고, 수억 명에 달하는 전 세계 빈민들과의 약속을 깨뜨리기 위해서라는 말인가?”
지금 트럼프는 단지 미국의 외교정책만을 바꾸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미합중국 건국 이래 거의 250년간 굳건히 지켜졌던 도덕적 나침반의 방향을 제멋대로 재설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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