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우크라이나 휴전 문제에 대해 극히 제한적인 수준만 합의하자 유럽에 안보 불안이 다시 한 번 확산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평화유지군의 우크라이나 파병 논의가 본격화된 가운데 이탈리아 등 상당수 국가는 난색을 표하고 있어 신속한 대응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유럽 주요국 정상 대다수는 18일(현지 시간) 트럼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간 통화 내용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는 러시아의 요구에는 선을 그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베를린에서 가진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견고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상세하고 완전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숄츠 총리도 “우크라이나는 유럽에 의지할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이 이날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30일 간 에너지·인프라 공격 중단, 포로 교환에는 합의하면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외국의 군사·정보 지원 완전 중단을 요구한 데 대해 곧장 반대 의사를 낸 셈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실도 “러시아가 불법적 침공을 다시는 저지르지 못하는 데 필요하기에 우크라이나와 함께할 것”이라고 반발했다. 영국 총리실은 전날에도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종전 뒤에도 보장하기 위한 유럽 중심의 자발적 국제 연합체 ‘의지의 연합’에 30여 개국이 참여할 준비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영국 총리실은 실제 파병하는 국가도 상당수가 될 것이라며 오는 20일 런던에서 관련 작전 계획 단계를 논의하는 참여국 군 수뇌부 회의가 열릴 것이라고 알렸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데이비드 래미 영국 외무장관은 이날 런던에서 카야 칼라스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 대표와 만나 종전 이전에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군사 지원을 보낼 방안을 논의했다.
래미 장관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든 전투가 끝나는 것이지 푸틴 대통령이 재무장을 할 기간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미국·러시아 정상 통화 직전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핀란드 헬싱키 공식 방문 사실을 공개하며 “협상에 유럽이 반드시 참여해야 하고 안보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함께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교가 일각에서는 다만 미국·러시아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관계가 모두 달라 유럽이 실제 강력한 공동 대응안을 내놓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개별 국가가 처한 경제와 안보 상황도 제각각이라 파병 등 각론에 있어서는 찬반 의견이 충돌할 수 있다는 예상이 나왔다.
실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이날 곧바로 프랑스·영국이 추진하는 유럽군의 전후 우크라이나 주둔 계획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멜로니 총리는 상원 연설에서 “이탈리아군의 우크라이나 파병은 논의된 적이 없다”며 “프랑스와 영국이 제안한 유럽군 파병은 매우 복잡하고 위험하며 효과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멜로니 총리는 또 EU 집행위원회가 추진하는 8000억 유로(약 1300조 원) 이상 규모의 ‘유럽 재무장 계획’에 대해서도 “오늘날에는 단순히 무기를 구입하는 것만이 방위력 강화의 전부가 아니다”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멜로니 총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틀 밖에서 유럽이 독자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며 “유럽과 미국을 분리해서 지속적인 안보를 보장할 수 있다는 상상은 현실을 간과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앞서 숄츠 총리도 지난 6일 EU 특별정상회의에서 “유럽은 미국의 관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며 마크롱 대통령의 ‘프랑스 핵우산론’에 반대한 바 있다. 숄츠 총리는 지난달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럽 정상 긴급 회의에서도 유럽군 파병안에 대해 “좀 짜증이 난다”며 “매우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도 같은 자리에서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을 위해 폴란드 군대를 파견하는 건 상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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