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전 휴전 협상에 나선 미국과 러시아가 에너지 및 인프라 시설에 한정한 30일 간 ‘부분 휴전’에 18일(현지 시간) 합의했다. 우크라이나도 미러 간 합의에 일단은 찬성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다만 전면 휴전을 넘어 전쟁 종식까지 갈 길이 한참 남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이날 2시간 가량 통화를 한 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이 에너지와 인프라 시설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통화 직후 자국 군에 에너지 인프라 시설에 대한 공격 중단을 명령했다. 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 중 사로잡은 포로 총 350명(각각 175명)을 교환할 예정이라는 발표도 나왔다.
외신들은 트럼프와 푸틴의 통화로 도출된 부분 휴전이 3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전쟁 종식의 첫발을 뗀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미 백악관은 이날 “(러시아와) ‘흑해 해상에서의 휴전 이행과 전면적 휴전 및 영구 평화에 관한 기술적인 협상’을 즉시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미러는 23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휴전 논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두 정상은 또 핵무기 비확산 문제에도 협력하기로 하면서 글로벌 핵군축 논의가 탄력을 받을지 주목된다.
“푸틴, 사실상 ‘완승’”
그러나 부분 휴전안이 공개되자 국제 사회의 의구심이 이어졌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휴전’이 맞는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다.
가장 큰 문제는 러시아가 휴전의 전제로 내건 조건들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통화에서도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정보 지원을 즉각 멈추고 우크라이나 역시 휴전 기간 동안 재무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 조건을 고수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가 전쟁 종식을 위해 양보할 의사가 있다는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향후 휴전 논의 과정에서 영토 문제, 유럽의 ‘평화유지군’ 파병 등 민감한 사안을 다뤄야 하는 만큼 전면 휴전까지 난제가 수두룩할 것으로 전망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부분 휴전안을 환영하면서도 “세부안을 들은 후 입장을 밝히겠다. 미국이 러시아가 합의를 이행하도록 잘 감시해야 한다"는 신중한 입장을 내놓았다.
미국과 러시아는 부분 휴전의 대상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설명을 내놓았다. 미 백악관은 러시아와 ‘에너지 및 인프라(energy and infrastructure)’에 대한 공격 중단이라는 부분 휴전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30일간 공격을 중단할 대상에 대해 ‘에너지 인프라(energy infrastructure)’라고 적시했다. 미국의 발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다리나 주요 도로·항구·철도 등 인프라에 대한 공격이 중단되지만, 러시아는 공격 중단 대상을 발전소 등 에너지 인프라로 범위를 좁힌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 점을 근거로 푸틴 대통령이 사실상 양보한 것이 거의 없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러시아는 겨울철 혹한을 무기로 삼기 위해 늦가을이나 겨울에 우크라이나의 발전소와 같은 에너지 인프라를 공격했는데,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된 만큼 에너지 인프리에 대한 공격이 우크라이나에 치명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푸틴 대통령이 아무 것도 양보하지 않은 채 사실상 완승을 거뒀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면 휴전까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암시했다고 짚었다.
러·우, 부분 휴전 직후 에너지 시설 공방 주고 받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부분 휴전이 이뤄졌다는 발표가 무색하게 공방을 이어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트럼프와 푸틴 두 정상 간 통화가 있은 다음 날인 우크라이나 북동부 수미 지역 당국은 전날부터 이날 새벽까지 러시아 드론이 지역 병원 두 곳을 공격해 환자와 의료진이 대피했다고 밝혔다. 영국 텔레그래프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지역의 소도시에 있는 에너지 인프라를 타격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남부 크라스노다르주 당국은 이날 오전 우크라이나군 드론이 캅카스카야 지역의 한 석유 창고를 공격해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간 우크라이나의 종전 협상 참여를 주장해온 영국과 프랑스는 이번 부분 휴전에 찬성하지만,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결정에는 반대의 뜻을 드러냈다.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 대비해 ‘미국 없는 안보’ 강화에 나선 유럽연합(EU)은 이날 회원국 간 무기 공동 조달 가능, 범유럽 군사 장비 시장 구축 등을 담은 국방백서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5년 뒤인 2030년까지 EU가 ‘재무장’을 완료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러시아와 밀착하는 움직임을 이어갈 경우 EU가 중국과 연대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윌리엄 매슈스 선임연구원은 “미국과 러시아에 동시 대응하기 위해 (EU가) 중국을 끌어들이는 것은 감수할 가치가 있는 도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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