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그간 우클릭 행보를 통해 중도충 공략에 힘써 왔다. 20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4년 만에 성사된 만남에서도 경제 회복을 위한 기업 역할론을 강조했다.
특히 인공지능(AI)과 같은 첨단 전략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의 직접투자 필요성도 재차 띄웠다. 이 대표는 앞서 ‘한국형 엔비디아’ 육성을 위해 50조 원 규모의 국민·국부펀드 조성 의지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재계에서 바라던 ‘반도체특별법 처리’ 같은 쟁점 현안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었다. 노동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 대표가 기업에 대한 과감한 규제 개선 등의 요구를 외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날 이 대표와 이 회장의 만남은 ‘삼성 청년 소프트웨어 아카데미(SSAFY)’ 현장 간담회를 중심으로 총 75분가량 진행됐다. 이 대표가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되고, 삼성이 잘돼야 삼성에 투자한 사람들도 잘산다”고 하자 이 회장은 “사회와의 동행이라는 이름 아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사회 공헌을 떠나 미래에 투자한다는 기조를 끌고 SSAFY를 이끌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현장을 찾은 민주당 의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SSAFY 교육생들과 AI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년들이 기를 많이 받을 것 같다”고 화답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비공개 환담에서는 이 회장이 코로나 시기 중소기업의 최소 잔여형(LSD) 백신 주사기 협력 등을 보람 있던 사례로 소개했다. 이에 이 대표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많이 해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두 사람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통상 정책 등 국제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더 긴밀하게 협력하고 공공외교를 강화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특히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둔 만큼 이 대표는 전략산업에 대한 국가 차원의 투자에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냈다. 이 대표는 “정부 투자에 안정성이 있어야 하지만 모범적 사례가 있으니 모범적인 투자를 공공 영역이 일부 부담해야 한다”며 “연구개발(R&D) 부문에서도 스타트업이든 벤처든 기회와 비용을 공공에서 최대한 많이 책임져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재계의 관심을 모았던 ‘반도체특별법’이나 ‘상법 개정안’ 등 기업들의 경영 활동과 직결되는 쟁점 현안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앞서 민주당은 여야 간 이견이 팽팽한 반도체특별법을 신속 처리 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다. 여당이 주장하는 ‘주 52시간 근무 예외 적용’ 조항에 이 대표도 동의하는 듯했으나 당내 일부 의원들과 노동계 반발이 거세지자 이 부분을 제외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반도체특별법은 고시 개정을 통해 (특별연장근로 확대를) 하겠다고 어느 정도 정리된 것 아니냐”며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문제는 삼성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고 자체 진단할 정도로 위기를 맞은 상황이라는 점이다. 실제 이 회장은 최근 2000여 명의 삼성 계열사 임원들을 대상으로 사즉생의 자세를 주문했다. 9년 만에 임원 교육을 열어 정신 재무장을 주문해야 할 만큼 삼성이 맞은 위기가 범상치 않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그룹 핵심 사업인 반도체에서 삼성전자는 범용 메모리반도체의 부진과 고대역폭메모리(HBM) 납품 지연 등으로 지난해 시장의 기대에 못 미치는 실적을 냈다. 2030년까지 1위를 넘봤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영역에서도 업계 1위 TSMC와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전 세계 TV 시장점유율 역시 2017년 이후 최저다.
그런 만큼 재계에서는 유력 대권 후보와 재계 1위 총수 간 만남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보다 과감하고 근본적인 규제 개선 등 기업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지원책이 안 보인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삼성을 포함해) 재계에서는 오늘 52시간 근로시간 유연화 등 노동 규제 완화에 대한 진전된 논의를 원하지 않았겠냐”며 “현재 같은 규제 하에서는 혁신을 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한 재계 임원은 “개별 기업 차원의 혁신도 필요하지만 입법 등을 통한 정치권의 제도적 뒷받침도 절실하다”며 “반도체특별법은 물론이고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도 재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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