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거주하는 타이완의 타이난은 인공지능(AI) 반도체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다. TSMC의 첨단 생산시설도 있지만 젠슨 황 엔비디아(NVIDIA) 최고경영자(CEO)와 그와 사촌 간인 리사 수 AMD CEO가 타이난 출신이라서 그런 것 같다. 필자가 재직하는 타이난의 CTBC비즈니스스쿨 학생들은 평소 조용하지만 반도체와 AI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면 입에 거품을 물고 얘기하기 바쁘다. 그들은 황과 수를 뿌듯해하고 백악관에서 아리조나 주에 1000억 달러 추가 투자를 발표하는 웨이저자 TSMC 회장을 자랑스러워한다.
CTBC비즈니스스쿨은 이미 6년 전 AI 금융학과를 설립해 글로벌 금융인력을 길러내고 있고, 자매대학인 타이난의 CTBC과학기술대학은 반도체 전문인력을 집중적으로 키워내고 있다. 타이완 굴지의 CTBC금융지주는 100개가 넘는 해외지점·현지법인 등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AI 금융인재를 대거 채용하며 한때 타이완을 ‘지옥섬’이라며 자조하던 청년들에게 미래의 꿈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타이난 과학단지에는 TSMC의 5나노·3나노 반도체공장이 입지해 있는데 공대생에게는 ‘신의 직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TSMC가 넘사벽이었던 삼성전자를 따라잡고 ‘실리콘 방패’ 또는 ‘호국신산(護國神山)’이라 불리며 타이완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TSMC는 타이완 정부의 산업육성전략과 창업자 모리스 창의 비전이 결합해 출범한 이후 40년이 지난 현재 산학연관(産學硏官)의 입체적인 협력체계와 지역사회 및 전 국민의 전폭적인 성원으로 타이완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
더구나 대내적으로 타이완은 정치적 갈등이 우리 못지않게 치열하지만 국익과 관련해서는 일사불란하게 협력한다. 2023년 ‘대만판 칩스법’을 마련해 TSMC 등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예산 및 제도적 지원을 아까지 않는 것이 대표 사례다. 이에 힘입어 TSMC는 지정학적 여건 변화와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도 상당 기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중심이 돼있을 것 같다. 타이완에 추월당하고 중국에 바짝 쫓기며 흔들리고 있는 우리 반도체 산업으로서는 그저 부럽기만 하다.
사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지금처럼 대내외적 도전에 직면하거나 집중포화를 맞은 적은 없었다. 특히 기술이 국제정치의 패권을 정하는 ‘기정학’(Techno-politics) 시대의 핵심 전략산업인 반도체는 트럼프 2.0 시대에서 더욱 거센 파도를 넘어야 한다. 타이완은 TSMC가 추가적 투자를 약속했음에도 미국 제품의 시장 접근을 제한하는 ‘지저분한(dirty) 15’ 국가에 포함될까 봐 무척 긴장하고 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트럼프발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신보호무역주의 강화, 경제 블록화 현상 가속화 등은 우리나 경쟁국들도 다 같이 극복해야 할 과제다.
한국경제는 반도체 산업에 머무르지 않고 경제 전반에 걸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국가 리더십 실종, 혁신역량 저하, 성장동력 약화, 생산가능인구 감소, 노동부문의 경직, 극한적인 정치적 갈등 등 대내적 어려움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서 기인한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반도체 산업이 추월당하고 쫓기는 형국처럼 한국경제의 활로는 보이지 않는다. 특히 반도체 경쟁국들이 ‘칩스법’ 제정 등 전방위적 정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우리는 몇 년간 논쟁만 하고 겨우 마련한 ‘반도체 특별법’ 등이 국회에서 낮잠만 자는 현실은 뼈아프다. 이제 더 이상 ‘남 탓하지 말고 내 탓이오.’라며 자성하고 급변하는 환경 속에 우리의 저력을 다시 보여줘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국가 리더십 부재에 따른 불확실성을 속히 제거하고 노동 및 산업 등 경제 전반의 구조개혁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둘째, 차세대반도체·바이오·AI 등 게임체인저 분야의 성장동력 육성에 정책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 셋째, 주력산업이 정부 규제나 정치적 갈등에 휘둘리지 않고 기업이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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