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50여 일 만에 장중 1470원대를 돌파했다. 미국 서비스업 경기 호조에 따른 달러 강세와 국내 정치 불안 요인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불확실성, 안전자산 선호 등으로 원·달러 환율이 지속해서 상승 압력을 받을 경우 경기 하방에 대응하기 위해 추가 금리 인하 가능성을 열어뒀던 한국은행의 셈법도 복잡해질 것으로 보인다.
25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날 대비 1.5원 오른 1469.2원에 주간 거래를 마감했다. 이날 환율은 1467.6원에 개장한 후 달러 강세를 반영해 곧바로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오전 10시 40분께 1470원을 터치하고 11시께 1471.1원까지 고점을 찍었다. 원·달러 환율이 주간 거래에서 1470원을 웃돈 것은 2월 3일(1472.5원) 이후 51일 만이다.
이날 환율 상승은 강달러와 미국발 관세 불확실성이 겹친 결과라는 분석이다. 전날 발표된 미국의 서비스업 지표 호조로 달러화 가치가 상승한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관세 부과일이 다가오면서 원화를 짓눌렀다는 평가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의 무역적자 규모가 큰 국가를 ‘더티15’로 지목하고 다음 달 2일부터 상호관세를 발효할 예정이다. 한국이 더티15에 포함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질수록 원화에도 부담이 크다. 위재현 NH선물 연구원은 “최근 외국인이 4일 연속 선물 시장에서 달러를 매수하고 있는데, 4월 2일 미국의 관세 부과일이 다가온 영향인 것 같다”면서 “상황이 이렇게 되니 원화도 약세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치 관련 불확실성도 원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 최근 자국 내 정치적 이슈가 불거진 튀르키예나 인도네시아 통화가 받는 약세 압력과 유사한 상황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원화(-2%), 튀르키예 리라(-6%), 인도네시아 루피아(-1.4%) 등은 달러화 대비 절하됐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위원은 “최근 약세를 보이는 통화들의 공통점이 자국 내 정치적 불안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면서 “한국의 관세 취약성이 깔린 데다 탄핵 이슈가 지속되면서 원화가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정치적 불확실성이 장기화할 경우 환율뿐만 아니라 한국의 국가신용등급까지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씨티은행은 최근 보고서에서 “헌재의 탄핵 심판 선고가 4월 중순 이후로 미뤄질 경우 정치적 불확실성이 장기간 이어지고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이 또다시 탄핵소추를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행의 셈법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앞서 한은은 2월 수정경제전망에서 2분기 내 정치적 안정을 전제로 올해 한국의 성장률을 1.9%에서 1.5%로 하향 조정했다. 그러나 일각의 우려대로 정치 불안이 올 2분기에도 이어지고 원·달러 환율 상승세가 지속된다면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낮추려던 한은의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설사 한은이 금리를 내린다고 하더라도 한미 금리 격차 확대로 원·달러 환율이 더 오를 수도 있다. 한은은 최근 공개한 2월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회의 의사록에서 “기준금리 인하가 환율·가계부채 등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크게 나타날 가능성이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다만 환율이 단기간 내 큰 폭으로 뛰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는 원·달러 환율 1500원을 앞두고 외환 당국이 개입에 나서 시장의 달러 매도세도 움츠러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시장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전략적 환 헤지를 통해 시장 상황을 보면서 매일 달러 출회 물량을 조절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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