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경남북 지역을 잿더미로 만든 산불이 겨우 일주일만에 진화되었다. 그 피해는 역대 산불 가운데 최악이라는게 산림당국의 분석이다. 유행할게 없어서 전세계적으로 산불이 유행하는가.
할리우드가 재난 영화를 즐기지만, 최근의 산불 사태는 가상의 영화 장면이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 1월에 있었던 미국 로스엔젤레스 대화재를 기억할 것이다. 캘리포니아 퍼시픽 팰리세이드에서 시작된 이 대형 화재는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사람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마치 악마의 바람을 타고 토네이도처럼 거세게 몰아친 불기둥은 괴물이 온 동네를 불태우는 ‘지옥’과 같은 상황이었다. LA에서 라이브 뉴스를 지켜보던 필자는 불길이 할리우드 힐스 인근까지 번지는 모습을 보며 몸서리 칠 수 밖에 없었다.
화재피해 지역중 하나인 이곳은 서울과 LA를 오가며 지내는 필자의 동네 부근이었다. 산불이 확산되던 상황에서 머릿속이 하얘지고 무엇을 챙겨야 할지, 어떻게 대피해야 할지 막막했다. 퍼시픽 팰리세이드 화재는 진압용 물 부족으로 급기야 환경 전문가들이 지적한 토양 생태계 파괴, 비행기 기체 금속 부식의 원인까지 감수하며 바닷물을 퍼내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단순한 재난을 넘은 문제였다.
팰리세이드의 낙원이 신을 질투하게 만들었을까. 지역 주민들이 겪은 초자연적인 분노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집에 가봤자 물도 안 나오고 전기도 안 들어오고… 어렸을 때부터 살던 동네 전체가 잿더미가 됐어.” 전화기 너머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족과 샌프란시스코로 피신했던 그는 LA의 유명 영화 프로듀서이자 스타 배우 스티븐 연과 함께 백남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그가 살던 동네는 멜깁슨을 비롯한 할리우드 스타와 패리스 힐튼, 바이든 전 대통령 아들 헌터 바이든, 금융계 거물들이 사는 고급 주택가였다. 그들의 집과 소장한 앤디 워홀의 예술품과 20세기 혁명적 작곡가 쇤베르크의 오리지널 악보는 모두 화마에 잿더미로 변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집 주변 한 블록만 살아남았고,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지만 여전히 인프라 공급망이 파괴되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화재로 인한 피해는 개인 재산을 넘어 LA의 예술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품과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러나 이처럼 극심한 피해속에서도 예술은 중요한 회복의 도약대가 되었다. 당초 취소될 가능성이 높았던 ‘프리즈 LA 아트페어’는 2월에 당당히 문을 열었다. 전 세계 약 100여개의 갤러리들이 참여하였고 이 아트페어는 재난 상황에서 예술이 어떻게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산타모니카 공항에서 개최된 프리즈는 산불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예술적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LA의 예술계는 도시의 문화 회복을 돕기 위해 즉시 게티 (The Getty Foundation), 포드 (Ford Foundation), 스필버그 (The Spielberg Foundation), 앤디 워홀 재단 (Andy Warhol Foundation)으로부터 1,200만 달러의 기금을 조성하여 피해 예술가와 예술 종사자들에게 제공할 보조금을 모았다. 또한 도시의 3대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뮤지엄(LACMA), LA현대미술관(MOCA), 해머미술관(HAMMER Museum)이 협력해 전례 없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지역 예술가들이 예술 작품을 기증하거나 자선 공연을 열어 복구 기금을 모았다.
기존의 전통적 방식 외에도,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해 물리적 공간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술가들은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화재 피해를 입은 갤러리와 예술 공간은 온라인으로 선보였고,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한 활동도 이어졌다. 공공 예술 프로젝트는 피해 지역에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지역 사회 재건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술은 물리적 공간 복구를 넘어 정서적 치유의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았다.
피해를 입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다수 진행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예술 단체들은 피해 예술가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창작 활동을 재개할 수 있도록 크라우드 펀딩 기금을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캠페인은 빠르게 확산되어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끌어냈다. 경험 많은 예술가들은 후배 예술가들과 멘토링을 하거나 협업을 통해 창작 활동을 이어갔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심리적 지원과 위로를 주고 받았다. 또한 UCLA 파울러 박물관에서는 ‘불의 혈연 Fire Kinship·남부 캘리포니아 토착 생태와 예술’이라는 ‘불’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렸다.
현대 예술가들은 비디오, 조각, 초상화, 설치 작품등을 통해 재난을 예술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불’에 대한 깊은 사유를 풀어냈다. 이 전시는 이를 통해 예술이 재난 복구와 사회적 치유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이처럼 예술가들의 애도 속에서 희망의 불씨는 남아 있었다. 이번 화재는 단순히 물리적 피해를 남긴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마치 불사조의 신화처럼, 예술은 불멸의 상징을 다룬다. 불사조는 스스로를 태워 죽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고 전해진다.
LA 예술계는 화재라는 큰 시련을 거쳐 새로운 창조의 힘을 만들어내고 있다. 철학자 다나 해러웨이는 불안정한 시대에서 ‘트러블’을 이야기하며, 파괴된 현상을 한탄하기보다는 삶의 가능성을 찾아온 우리의 역사를 돌아본다. 뒤죽박죽 혼탁한 시대에, 생태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묻고, 고통과 즐거움이 얽힌 시대에서 서로 창의적으로 연결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제시한다. 예술은 바로 이러한 연결을 가능하게 하며, 인간의 회복력과 창의력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번 화재피해는 단순한 재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술을 통한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 회복의 중요성을 일깨운 사건이었다. 비단 미국과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산불과 같은 자연재해는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며, 인류세로 불리는 현시대는 단순히 특정 지역의 문제를 넘어서, 전 지구적인 생태적 문제로 연결된다. 기후 변화가 야기하는 재난은 우리가 처한 시대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우리도 앞으로 이러한 재난사태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으로 정부와 시민단체, 문화예술계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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