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탄핵심판은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일정을 훨씬 뛰어넘는 긴 여정이었다. 그만큼 논란도 많았다. 78년 대한민국 헌정사를 새로 써야 할 정도로 초유의 일들이 속출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세 번째 대통령 탄핵에 헌정은 중단됐다. 헌법재판소는 4일 탄핵심판 선고에서 “군경을 동원해 국회 등 헌법기관을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해 헌법수호 의무를 저버렸다”며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반행위”라고 판시했다. “경고성·호소용 계엄이었다”는 대통령의 주장은 철저하게 배척됐다.
8대0 전원일치. 먼저 심판과정에서 극심한 가슴앓이를 감내한 재판관들에게도 존경과 위로를 보낸다. 다만 재판을 너무 서둘렀다는 비판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실체적 정의도 중요하지만 절차적 정의부터 다잡아야 국민 수용성이 높아진다. 결정문 발표에서도 시간상으로 보나 절차상으로 보나 탄핵의 출발점인 비상계엄 선포 절차부터 논의하는 게 바람직했다. 즉 국무회의 소집, 의결, 관계 국무위원과 총리의 부서 존재 여부 등을 먼저 판단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비상계엄 선포행위 그 자체는 통치행위다. 그러나 통치행위도 헌법상 요건은 갖춰야 한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발령한 ‘금융 실명 거래를 위한 긴급재정경제명령’에 대한 위헌소원에서 헌재는 이를 분명히 한 바 있다. 이번 비상계엄은 헌법 제77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라는 요건을 ‘현실적으로’ 전혀 충족하지 못했다. 더 나아가 비상계엄 이후에 내려진 포고령 등 명령은 헌법과 계엄법에 따라 발령된 것이므로 사법심사의 대상이다. 계엄사령관이 내린 포고령 제1호 제1조는 국회의 권한을 제한했다. 이는 위헌‧위법이다. 특히 헌재는 계엄군의 국회 진입 과정에서 위대한 국민들의 저항과 군대·경찰의 소극적 대응을 분명히 적시했다. 따라서 계엄의 주모자를 제외하고 군경 관계자 등 사법처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용서하고 아량을 베풀자.” 법의 온정으로 국민 통합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헌재는 국회의 탄핵소추 사유에 명시된 대통령의 내란행위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판단한다. 탄핵 찬성의 화두는 ‘내란 우두머리(수괴) 윤석열 파면’이었다. 내란 우두머리는 분명 강렬한 울림을 준다. 그렇지만 내란죄 확정판결에는 법원의 3심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헌재는 논란의 대상이었던 계엄 선포 당시 주요 정치인·법조인 등의 위치를 확인하려 시도했다는 점도 사실로 인정했다. 대통령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국방부 장관은 필요시 체포할 목적으로 국군방첩사령관에게 국회의장, 각 정당 대표 등 14명의 위치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고 결정문에 적었다. 즉 국가 주요 인사, 특히 전·현직 최고위법관 등에 대한 체포명령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인정하면서 특히 사법권 독립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봤다. 유언비어의 온상이던 선거부정 주장은 철저히 배척됐다. 그런 점에서 헌재는 명시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내란행위로 나아간 점을 인정한 셈이다.
대통령이 사라진 자리에 거대 야당이 정치의 중심축에 선다. 헌재는 비록 탄핵을 전원일치로 인용했지만 동시에 탄핵을 촉발시킨 거대 야당에 대해서도 의회민주주의의 복원을 엄중하게 경고했다. 대화와 타협 그리고 협치만이 민주공화정을 수호하는 길임을 분명히 판시한다. 애먼 국민들은 정치지도자를 잘못 뽑은 죄로 엄동설한에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탄핵에 반대한 국민들은 아쉽기 마련이다. 이제는 양극단의 시대를 끝내고 통합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탄핵 과정에서 드러난 모든 시시비비는 역사에 묻고 새로 출발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합법성에 매몰되기보다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국가이성(Raison d’État)을 숙고할 때다. 일제강점기, 민족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도 세계의 모범국으로 우뚝 선 국민적 저력을 보여줄 때다. 국제통화기금(IMF) 환란을 최단기간에 극복한 저력을 발휘해 파탄 난 정치로부터 국민과 국가를 구원해야 한다.
탄핵의 시간은 가고 정치의 시간이다. 선고 후 60일 이내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 탄핵에 따른 여진이 대선까지 이어져서는 안 된다. 깨끗한 한판 승부로 새 정부가 출범해야 한다. 무엇보다 새 대통령은 파탄에 이른 ‘87년 체제’를 끝내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은 대선 과정에서 개헌을 공약하고도 정작 취임하고 나면 개헌에 관심이 없다가 임기 말에 이르러 개헌을 주장한다.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 대선 공약을 취임과 동시에 실천에 옮겨야 한다. 가능하면 올해 안에, 늦어도 내년 지방선거까지는 개헌을 해야 한다.
위대한 제7공화국 출범을 위해 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하기 위해 권력구조에 변화가 필요하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헌법상 비상적·예외적 상황에 대비한 제도인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 건의, 탄핵소추, 법률안 거부, 비상계엄이 오히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제도로 작동했다. 국민들은 대통령직선제를 원한다. 그렇다면 국회에 내각불신임권을 부여해 국정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과 국회의 신임을 받는 내각이 정부 안에서 조화롭게 작동돼야 한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해 침잠하면서 국민 통합을 이끌어가는 지도자여야 한다. 국가의 존립과 안전에 직결되는 국방·외교 그리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은 대통령의 몫이다. 그러나 국내 정치는 내각과 국회의 장으로 돌려야 한다.
대의민주주의의 현장인 국회에 힘을 실어주는 대신 국회도 개혁해야 한다. 스스로 개혁하지 못하면 외부에서 힘을 가해야 한다. 국회와 국회의원이 누리는 갖가지 특권 폐지는 정치 개혁의 출발점이다. 면책특권·불체포특권은 폐지돼야 한다. 단원제 국회의 상상력에 기초한 ‘난폭 운전’을 제어하기 위해 이성에 기초한 상원이 필요하다. 상원은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을 대표하고 통일시대에 국민 통합을 위해 꼭 필요하다.
세계에서 그 예를 찾기 어려운 국정감사도 폐지해야 한다. 정권교체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국정감사는 의원들의 ‘연례 놀이터’로 전락하고 정부를 마비시킬 뿐이다. 극단적 양극화를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의 다원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적 다수대표제 대신 전면적인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이제 국회의원이 지역구를 챙기는 일은 지방자치로 넘기고 진정한 국익의 대변자로 헌신해야 한다. 이 정도의 개헌이라면 국회 법정단체인 헌정회장이 제시한 개헌안에도 다 나와 있다. 조금만 숙의 과정을 거치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절제와 자제를 잃어버린 정치권에 대한 경종은 결국 주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살아 있는 주권의식만이 이 난국을 타개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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